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점지한 성지 낙산사洛山寺
강릉에서 동해안을 따라 속초를 향해 북쪽으로 42km 정도 달리면 낙산사가 나타난다.
서쪽 낙산사 입구에 홍예문과 매표소가 있다.
홍예문을 지나면 왼쪽엔 숲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공간이 나타난다.
잘 정돈된 앞길을 따라 걸으면 동쪽으로 의상대와 홍련암으로 가는 길이 아래로 나 있다.
왼쪽 산등성이를 오르면 사천왕문四天王門이 나타난다.
동쪽에는 해수관음보살의 옆모습이 송림 위로 경쾌하게 솟아 있다.
단아하고 소박한 사천왕문은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관문처럼 서 있다.
사천왕은 밖으로는 천신의 위엄과 용맹을 보이고 안으로 보살의 자비를 돕고 사방을 진무하여 불법을 보호하고 권위를 베풀어 상벌에 사私가 없기를 원하며 마귀를 항복시키는 신장神將을 말 한다.
풍경소리와 산새들의 지저귐, 출렁이는 동해의 물결을 굽어보는 낙산사의 정취는 가히 관동팔경의 하나로 손색이 없다. 숱한 전화戰禍를 딛고 오늘까지 면면히 이어온 사찰의 구석구석엔 사람들의 의지와 혼이 맥맥이 흐르고 있다.
1200여 년 전의 의상대사와 낙산사에 얽힌 창건설화를 떠올려본다.
의상대
낙산사 유래
낙산사가 있는 산 이름을 낙산이라 한 것은 인도 남쪽 해안에 있는 관음의 주처住?로 산의 모양이 8각형인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에서 딴 것이라 한다.
낙산이란 potalaka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음역音譯이다.
낙산 동쪽 바닷가에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굴이 하나 있는데 이 굴은 자비慈悲의 화신化身인 관음보살이 거처하던 성지라 한다.
종남산 지엄화상知儼和尙에게 화엄학華嚴學을 공부한 의상대사가 귀국하여 낙산사에 관음觀音의 진신眞身이 이 해변 굴 안에 머무신다는 말을 듣고 친견親見하기 위해 찾아왔다.
의상이 재계齋戒한 지 7일 만에 앉은 자리座具를 새벽물 위에 띄웠더니 천天, 용龍 등 팔부중(八部衆; 사천왕이 거느리고 있는 여덟 귀신)이 굴 속으로 그를 인도하였다.
의상이 공중을 향해 예불을 드렸더니 수정염주水晶念珠 한 꾸러미를 내어주기에 그 염주를 받아가지고 물러 나오자 동해의 용이 다시 나타나 여의주如意珠를 바치자 스님은 받아가지고 와서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 관음을 친견하였다.
관음보살이 말하기를 “이 낙산 위에 올라가면 대나무 두 그루가 나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니 그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佛法이 크게 일 것이다.”라고 일러주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의상이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쌍죽이 땅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빚어 모시니 그 원만한 얼굴과 고운 모습이 천연스러웠다.
그리고 그 대나무는 없어졌으므로 그제야 이곳이 바로 관음의 진신이 거주하는 곳임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 절을 낙산사라 하고 의상은 그가 받은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성전聖殿에 모셔두고 떠났다.
홍연암 법당
그 후 몽골의 침입으로 13세기 초 큰 화禍를 입었으나 세조 13년 왕명으로 크게 중창하였고 예종叡宗 원년(1469)에도 왕명으로 중건이 있었다.
인조仁祖 9년(1631)과 21년(1643) 재차 중건이 있었으나 정조正祖 원년(1777)에 화재를 당하여 다음에 중건하였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되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 구한말에 와서 다시 예전의 절 모습을 찾았으나 6?25전쟁으로 또다시 소실되어 1953년 재건하였다.
지난 2005년 강풍을 타고 넘어 온 산불이 낙산사를 덮쳐 전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원통보전이 불타고 보물로 지정된 조선시대 동종이 녹아버렸다.
낙산사의 동종은 조선 예종이 1469년 그의 아버지 세조를 위해 낙산사에 보시한 종이다.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종이었으나 2,005년 4월 5일 낙산사의 화재로 녹아내려 보물지정이 해제되었고, 문화재청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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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 7층 석탑과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圓通寶殿 법당이 나타난다. 2005년 화재로 전소되어 다시 중건되었다.
원통보전 둘레를 네모꼴方形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조선 세조가 낙산사를 중수할 때 처음으로 축조하였다고 전한다.
이것은 지방유형문화재 34호이다.
암키와와 붉은 진흙을 차례로 다져 쌓으면서 상하 교차로 동일한 크기의 둥근 화강석을 일정한 형태와 간격으로 박아 아름다운 별무늬를 장식하고 있다.
벽에 박힌 둥글고 작은 화강석은 그 당시 세조가 지방행정구역을 8도로 나눈 것을 나타내었다.
원통보전 7층석탑
관음은 관세음의 약칭이며 관자재라고도 한다.
관음전觀音殿을 또한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하며 관세음의 위신력威神力을 가리켜 이르는 말이다.
절대적인 진리는 모든 것에 두루 통해 있다는 뜻으로 주원융통周圓融通의 약칭이라 한다.
관세음보살은 귀로 듣는 일에 가장 뛰어난 보살이므로 원통은 관세음의 별칭이며 중생의 소리를 듣고 가서 구원하는 대자대비한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화신이다. 중생을 끝없이 이롭게 하기 위해 서원誓願을 세운 관세음보살은 불가사이한 위신력으로 무수한 몸 ‘응화신應化身’을 나타내어 중생의 재난을 막아주고 지혜의 방편으로 시방세계十方世界 어디에든지 몸을 나타내지 않는 곳이 없다 한다.
32응화신三二應化身을 나타내면서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며 두 눈과 두 팔만 가지고는 중생을 보살피고 건져줄 수 없기 때문에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이 등장하게 된다.
관음신앙은 예전부터 우리나라에 민간신앙의 형태로까지 널리 보편화되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관세음보살’을 염念하면 그 재난을 극복하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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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관음보살 이야기
삼국유사의 낙산사 전설에는 생불生佛을 못 본 원효대사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후에 원효법사가 뒤이어 와서 예배하려고 처음에 남쪽 교외에 이르니 논 한 가운데 흰옷白衣(관음을 암시)을 입은 한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법사가 희롱 삼아 그 벼를 달라고 하니 여인은 벼가 열매 맺지 않았다고 희롱해 대답했다.
법사가 가다 또 다리 밑에 이르니 한 여인이 월경대月經帶를 빨고 있었다.
법사가 먹을 물을 달라고 청하니 여인은 더러운 물을 떠서 바쳤다.
법사는 여인이 준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한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말했다.
“제호醍?화상은 가지 마시오.” 하고는 갑자기 숨어서 보이지 않았다.
그 소나무 아래에 신발 한 짝이 벗어져 있었다.
법사가 낙산사에 도착하니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전에 보았던 신발 한 짝이 벗어져 있으므로 그제서야 전에 만났던 여인이 관음의 진신眞身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은 파랑새가 앉았던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하였다.
법사가 성굴聖窟에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참모습을 보려고 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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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보전을 나와 마당 한가운데 있는 7층 석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탑의 겉 모양이 조선시대 특유의 다층석탑多層石塔의 양식을 하고 있다.
이 탑은 본래 의상대사가 창건할 당시에는 3층이었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현재와 같은 7층으로 조성했다.
이때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탑 속에 봉안했다.
이 탑 상륜의 형태는 원대元代 나마탑喇?塔양식을 연상케 한다.
별무늬 장식의 아름다운 담장으로 둘러쳐진 원통보전의 지붕과 푸른 노송과 오죽烏竹, 단아한 모습으로 한가운데 서 있는 7층 석탑이 저녁노을에 비껴 마치 한번도 온 적이 없는 새로운 세계에 묻혀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극락과 지옥은 담장 하나 차이인가.
몇 번인가 되돌아보며 대문을 나서는 건 담장 너머 사바세계의 온갖 욕망이 들끓는 바다로 떠밀려 나가는 기분 때문일까.
원통보전에서 보타전寶陀殿으로 향했다.
2005년 대형 산불사태에도 홍련암과 함께 극적으로 화재에서 살아남았다.
법당에 들어가면 수많은 손과 얼굴을 달리한 거대한 나무 조각상들을 보게 된다.
이것은 우리나라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불상조각들이다.
보타전 전경
보타전의 중앙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은 모든 자비를 가장 넓게 포용하고 있는 11면 42수 관음이다.
거대한 하나의 원목으로 조성한 높이 20척의 불상이다.
이것은 성관음聖觀音과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천수관음千手觀音의 모습을 동시에 갖춘 관세음보살상으로 머리 위에는 열하나의 제각기 다른 표정을 띤 얼굴이 묘사되어 있다.
합장한 손이 있는가 하면 칼을 잡은 손이 있고 연꽃을 들고 있는가 하면 활을 잡고 있는데 42개의 손이 어지러울 정도로 제각기 독특한 물건을 잡고 있다.
관음본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3개씩 6관음상을 봉안하고 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이웃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6관음상과 32응신상을 모신 사찰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관음신앙의 뿌리가 매우 깊었던 우리나라에는 아직 6관음과 32응신상을 갖춘 사찰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된 지 1600여 년 만에 우리나라 제일의 관음성지 낙산사에 모든 관세음보살을 모신 보타전이 처음으로 건립된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이 불사는 낙산사와 특별히 인연이 깊었던 회주會主 오현五絃스님이 구심점이 되어 수많은 불교도가 동참하고 불교건축과 회화, 조각, 공예의 대가들이 함께 동참하였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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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타전의 육관음과 32응신상
육관음은 관음의 특성을 인격화한 것으로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신앙에서 6관음의 6도와 대비시킨 것이라 한다.
성聖, 천수천안千手天眼, 십일면十一面, 여의륜如意輪, 준제准提, 불공견색不空?索 관음보살을 이곳에 봉안하고 있다.
성관음聖觀音은 대자대비의 총체로서 어느 때에는 33신으로 자유자재로 변하면서 중생을 제도한다.
상호는 머리 위에 아미타불을 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천의天衣와 영락瓔珞(목이나 팔에 두르는 구슬을 꿴 장신구)을 걸치고 왼손에는 봉오리진 연꽃을, 오른손에는 모든 이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음을 나타내는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다.
천수관음千手觀音은 일체 중생을 이익이 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리라는 서원을 발하여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천이라는 수는 무한을 의미한다.
관음의 절대적인 대비심大悲心과 교화의 힘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천수관음은 여러 관음들 중 가장 힘이 있는 구제자救濟者로 신봉되고 있다.
탱화로 모실 때와 달리 조각상으로 모실 때에는 이들 모두를 묘사하는 것이 무리가 있으므로 42개의 손만 표출시킨다.
곧 42개의 손 중 합장한 두 손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밖의 40개의 손은 그 하나하나의 손이 25유有의 중생을 제도하므로 40x25=1천 개의 손이 된다고 한다.
보타전 관음보살상 1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은 죄를 소멸하고 복을 주며 병을 낫게 해주는 절대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 머리에는 열한 가지의 모습을, 손에는 감로병과 염주를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때의 감로병은 소원을 성취하는 것을, 염주는 중생의 번뇌를 단절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준제관음은准提觀音은 엄숙한 모성을 상징화한 것이다.
밀교에서는 이 관음을 칠구지七俱指의 불모佛母라고 칭하는데 칠구지는 7억億이라는 말로서 모든 부처님의 모체가 되는 이 보살의 공덕이 광대무변하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 형상은 흔히 세 개의 눈에 두 팔 혹은 4, 6, 8, 10, 18, 32, 82개의 팔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때의 세 눈은 중생의 세 가지 장애인 혹惑, 업業, 고苦를 남김없이 제거하여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갖게 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은 여의보주如意寶珠의 삼매 속에서 항상 법륜法輪을 굴려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로서 부귀와 권력, 지혜의 모든 염원을 성취시켜 주는 것으로 상징되고 있다.
이 보살의 손에는 보주를, 등에는 법륜을 지고 있다.
그리고 팔이 여섯 개인 육비좌상六臂坐像을 모시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이 여섯 개의 팔은 육도六道를 윤회하는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불공견색관음은 대자대비의 견색(새나 짐승을 잡는 그물)을 갖고 아무리 극악한 중생이라도 남김없이 구제하는 보살이다.
견색의 견?은 새나 짐승을 잡는 그물, 색索은 고기를 낚는 낚싯줄에 비유한 것이라 한다.
보살의 형상은 하나의 얼굴에 팔이 두 개, 두 얼굴에 네 개의 팔, 세 얼굴에 여덟 개의 팔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보타전 관음보살상2
32응신은 관세음보살의 응현應現(같은 말은 응화應化이며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일)하는 모습이 경전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법화경> 보문품의 33응신설應身說과 능엄경의 32응신설을 채택하고 있다.
부처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부처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고 벽지불, 법왕, 장자, 비구... 등 32신 또는 33신으로 응화應化하여, 제도할 대상에 따라 그에 알맞은 여러 가지의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관음의 응신은 특정한 형상이나 숫자의 형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 어느 것 하나라도 관음의 응신이 아닌 것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낙산사의 보타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채택하고 있는 능엄경의 32응신상으로 봉안하였고 그 뒤쪽으로는 1,500불의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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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벽엔 신중탱화를 나무로 양각한 희귀한 목각조상이 있고 바른쪽엔 나무꾼이 다섯 마리의 학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 학이 동자승으로 변해 나타나서 나무꾼에게 수기授記(부처가 수행자에게 미래의 깨달음에 대하여 미리 지시하는 예언과 약속)를 주면서 일러주는 장면, 의상대사가 파도가 휘몰아치는 깎아지른 바위(현재의 의상대 자리)에서 좌선 수도하는 장면을 그린 세 점의 탱화가 시선을 끌었다.
보타전의 자리에서는 옛 영산전의 자리로 불사를 할 때 기와조각과 같은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곳 관음지 위에 108평의 거대한 보타전을 건립한 내력과 그에 얽힌 전설을 회주 오현스님에 의해 전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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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타전에 얽힌 신효거사 이야기
삼국유사의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의 조항에는 신효거사信孝居士의 매우 신기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통일 신라시대 강원도 명주 땅에는 홀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아가는 신효거사가 있었다.
그는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했다. 어머니가 고기 없이는 밥을 먹지 않았으므로 산과 들을 다니며 사냥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냥감이 없어 동해 바닷가의 낙산까지 오게 된 그는 소나무 위에 앉아 있는 학 다섯 마리를 발견하고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학은 깃털 하나를 떨어뜨리며 날아가 버렸다.
거사는 무심하게 그 깃털을 주웠다. 그리고는 그 깃털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이제까지 사람으로 보이던 동료 사냥꾼들이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순간 거사는 큰 깨달음과 함께 사냥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부터 어머니 상에는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서 올리고 남몰래 정진하며 도를 구하였다.
얼마 뒤 어머니가 죽자 그는 출가하였다.
자기의 집을 절로 만들어 효가원孝家院이라 한 다음 신령스런 깃털을 들고 전국을 유랑했다.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깃털로 사람들을 살펴보았지만 짐승으로 보이는 이가 더 많았다.
그는 모두가 사람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곳에 머물고 싶었다.
마침내 만 3년이 되었을 때 경주를 거쳐 강릉 부근에 이르러 깃을 통해 사람들을 보니 모두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곳이 내가 머무를 곳이구나” 그는 기쁜 마음으로 길 옆 콩밭에서 김을 매고 있는 노파에게 집을 짓고 살 만한 곳을 물었다.
“서쪽 고개를 지나면 북쪽으로 향한 골짜기가 있으니 그곳에 집을 짓고 살 만합니다.”
노파는 말을 마치자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거사는 그분이 관세음보살임을 깨닫고 서쪽 고개인 대관령을 넘어 북쪽 오대산으로 들어가서 초가집을 짓고 수도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가사를 입은 스님 다섯 명이 나타났다.
“그대가 가져간 가사 한 폭은 지금 어디 있는가?”
거사가 영문을 몰라 멍하니 있자 스님이 일러주었다.
“그대가 집에서 사람들을 본 깃털이 그것이다.”
거사는 이에 깃털을 내주었다.
스님이 그 깃털을 가사의 없어진 폭 사이에 붙이자 그 자리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꼭 맞아 들어갔다.
그리고 찰나 사이에 다섯 스님은 흐릿한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제서야 거사는 깨달았다.
수년 전 낙산에서 본 학도 방금 나타났던 스님도 오대산에 항상 머물러 계신다는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지장보살, 석가여래, 문수보살의 화산이라는 것을……
신효거사는 이곳에서 얼마 동안 정진하다가 처음 오류성중五類聖衆(본불本佛을 따라다니는 다섯 종류의 성자들)을 만났던 낙산으로 다시 찾아갔다.
낙산의 원래 이름인 오봉산五峯山의 다섯 봉우리가 연잎처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지점(현재 보타전이 있는 곳)에서 기도를 하자 다섯 봉우리마다 학이 내려앉았다.
다시 기도를 계속하자 오대산에서 만났던 다섯 스님이 나타나 수기授記를 주면서 일러주었다.
“주위의 다섯 봉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요 그대가 앉아 있는 자리는 1천여 년이 지난 뒤 관세음보살이 말법중생을 제도하는 곳이 될 것이다.
부디 함부로 누설치 말고 자리를 더럽히지 마라.”
비로소 신효거사는 이곳이 오류성중이 사는 근원임을 깨달았다.
그 뒤 설악산 봉정암으로 들어가 기도하다가 이 사실을 전법제자에게 엄밀히 전한 다음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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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성중이 말법중생을 위해 자리를 정한 곳이요 신효거사가 점지한 성스러운 땅, 1천여 년 동안 비밀스럽게 전승되었던 이 뿌리 이야기가 오랜 세월의 산고 끝에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불가의 깊은 인연법을 되돌아보았다.
보타락과 석탑
발걸음을 보타락으로 돌렸다.
보타락은 보타전과 함께 창건하고 우리말로 광명光明, 해도海島, 소화수小花樹란 의미와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이 상주한다는 뜻으로 보타락이라 명명하였다.
관음지 연못을 조금 더 내려가면 지방유형문화재 48호인 의상대義湘臺가 나타난다.
만해 한용운이 쓴 의상대기에 의하면 1925년 이곳에 한 정자를 짓고 의상대라 이름지었다.
그것은 의상대사가 처음 낙산사를 창건할 당시 매양 이곳에 와서 입정入定했으므로 예부터 그렇게 불려왔다.
1936년 큰 폭풍으로 무너져 다시 세우고 지금의 의상대는 1975년 중건한 6각형 정자다.
하얀 파도가 포말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암벽에 부딪치고 세찬 해조음이 솔내음을 싣고 온다.
아침 해가 어둠을 뚫고 수평선을 붉게 물들일 때 가슴이 멎을 것 같다.
누각 위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해풍을 맞는 기분도 일품이다. 바위 틈 사이로 홍연암과 요사채가 보이고 저 멀리 대포항의 외옹치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의상대 앞 아름드리 관음송 옆에 서면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다. 발 밑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북쪽 산기슭을 돌아보면 해수관음상이 마치 이국의 여신처럼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같다.
의상대의 진면목은 해돋이 장소로 유명한 홍연암 부근에서 바라보는 원경遠景이다.
험준한 기암절벽 위에 수도승처럼 묵묵히 좌정하고 있는 의상대를 바라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휘영청 달 밝은 날 밤 낙산사에서 울리는 은은한 범종소리와 파도소리가 허공에 가득히 스며 오른다.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조신調信이라는 스님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의상대와 주변 전경
조신의 일장춘몽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세규사世逵寺 혹은 세달사世達寺의 장사莊舍(농장을 관할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인이 살던 집)가 명주溟州고을 내리군?李郡에 있었는데 서라벌의 본사本寺에서 조신調信을 그곳 장사로 보내어 관리하게 했다.
조신이 이곳에 와서 김흔의 딸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혹하여 홀로 은근히 마음을 태우기 시작했다.
조신은 이 사랑을 이루기 위해 낙산사의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서 혼인을 맺게 되기를 매일 기원했다.
그러나 그 처녀는 딴 곳으로 시집을 가고 말았다.
조신은 관세음보살을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꿈속에 생시와 같이 김태수의 딸이 나타나 슬픈 표정을 지으며 “스님, 저는 사실 처녀시절부터 스님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도에 정진하고 계시는 스님에게 저의 심정을 털어놓을 수도 없어 홀로 고민하다 부모님의 명에 의해 마음에 없는 시집을 가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스님에게 있어 그 괴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는 스님만 모시려고 집을 뛰쳐나왔으니 저를 더럽다 마시고 받아주시길 바랍니다”라고 울면서 호소했다.
조신은 그 여인을 데리고 불가佛家를 떠나 환속還俗하여 고향에 돌아와 속인俗人의 생활을 시작했으나 세상 물정에 어두워 살아갈 길이 막연하였다.
나이가 늙어감에 따라 부부의 애정은 깊어갔으나 아이들은 늘어나고 생계는 어려워 가족은 누더기 옷으로 겨우 살을 가리고 문전걸식門前乞食을 하며 연명해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렇게 떠돌며 걸식하는 동안에 명주 해현령을 지나는데 열다섯 살 된 큰 아이가 굶어 죽고 말았다.
통곡하며 길가에 묻어주었다.
나머지 네 자녀를 데리고 우곡현羽曲縣에 이르러 길가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부부가 병들어 거적에 눕게 되고 보니 열 살짜리 딸아이가 부모를 대신하여 집마다 다니면서 밥을 빌어 입에 풀칠을 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 아이마저 어느 날 밥을 빌러 갔다가 개한테 물려 자리에 눕게 되어 이제는 밥을 빌러 다닐 사람도 없게 되었다. 부인은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의복도 많고 깨끗했습니다.
한 가지 음식이라도 당신과 나누어 먹었고 얼마 안 되는 의복일망정 당신과 나누어 입으면서 함께 산 지 50년에 정이 맺어져 매우 친밀해졌으며 은애恩愛로 굳게 얽혀졌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쇠약해져서 생긴 병이 해마다 더욱 심해지고 굶주림과 추위가 날로 더욱 닥쳐오고 곁방살이와 보잘것없는 음식조차 남에게 빌어먹을 수 없게 되었으니 무엇인가 달리 대책을 세워야겠습니다.
당신은 나 때문에 괴로움을 받고 나는 당신 때문에 근심이 됩니다.
역경을 당하면 버리고 순경順境(모든 일이 순조로운 환경)이 있으면 친하고 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못 할 일이지만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있는 것이니 어린것들을 나누어 각기 헤어집시다.
” 조신도 그 생각이 옳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떠나려 하니 부인이 말했다.
“저는 고향으로 가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막 헤어져 길을 떠나려 할 때 그만 꿈을 깨었다.
등잔불이 깜박거리고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침이 되니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희어지고 망연하여 전혀 세상에 뜻이 없어서 사는 것도 싫어지고 한평생 신고辛苦를 겪은 것처럼 되었다.
돌아와 해현령에 죽은 자식을 묻었던 곳을 파보니 돌부처가 나왔다. 이것을 물로 씻어 부근의 절에 모셨다.
서울에 돌아와 장사의 직책을 그만두고 사재를 기울여 정토사淨土寺를 짓고 불도에 정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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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꿈이 아닌 것이 무엇이 있을까.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이 난다應無所住而其心'는 금강경 귀절에 대구로 읊은 야보도천冶父道天 선사의 선시禪詩가 나그네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망망대해의 바람과 파도소리 때문일까.
고요한 밤 산막에 말없이 앉았으니 山堂靜夜坐無言
고요하고 적막함이 본래 이런 것이구나 寂寂寥寥本自然
무슨 일로 서풍은 잠든 숲을 깨우고 何事西風動林野
한 소리 찬 기러기 긴 하늘을 울리네. 一聲寒雁?長天
금강경 오가해의 야보송金剛經 五家解의 冶父頌
산기슭으로 난 길을 따라 홍연암紅連庵으로 향했다.
홍연암 입구의 관음보살상 옆에는 맑은 샘물이 솟아 오르고 있다.
샘 옆에 의상대의 해돋이 시비가 서 있다.
천지개벽이야
눈이 번쩍 뜨인다.
불덩이가 솟는구나
가슴이 용솟음친다.
여보게
저것 좀 보아
후끈하지 않는가.
돌로 쌓은 산비탈 계단으로 올라가면 동향으로 자리 잡은 요사채와 높이 7.5m, 폭 8m, 세로 6m인 목조관음전이 나타난다.
의상이 관음을 친견하고 대나무가 솟은 곳에 지은 불전佛殿이 바로 이 암자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홍연암의 유래와 전설은 신라 문무왕 12년에 의상대사께서 입산하는 도중 돌다리 위에서 이상한 청조靑鳥를 만났는데 쫒아 들어가 본즉 청조는 석굴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대사는 이상히 여겨 7일 동안 밤낮으로 기도를 드렸더니 7일 후 바닷속에서 홍련紅蓮이 솟아오르고 그 홍련 속에서 관음보살이 현신하므로 대사가 친견을 하고 심중의 소원을 말하였다. 그래서 만사가 뜻대로 성취되고 무상대도無常大道를 얻었다.
홍연암에서 들려오는 독경소리가 파도를 타고 귓전을 맴돌고 있다.
청조가 들어갔다는 바닷가 암벽석굴 위에 자리 잡은 이 암자는 현존하는 법당의 양식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한 형태다.
바닷물이 투명한 유리로 만든 법당의 마루 밑을 통해서 오갈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의상에게 여의주를 바친 용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한 조치 때문일 것이다.
은은한 새벽 목탁소리를 들으며 일출로 붉게 물든 수평선을 바라보면 대자연의 장엄하고도 화려한 광경이 펼쳐진다.
법당에 들어서면 주불인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관음상 뒤 후불탱화는 관세음보살의 호법신장護法神將인 남순동자南巡童子가 연꽃을 들고 왼쪽에 있고 오른쪽에는 관음조觀音鳥가 염주를 물고 있다.
그 아래에는 해상용왕이 있어 관음도량의 창건설화를 얘기하고 있다.
홍연암에서 오른쪽 산비탈을 타고 좁을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의상대와 홍연암 중간쯤 되는 산 중턱에 커다란 사리탑이 동해를 바라보며 있다.
이 탑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5호로 조선 숙종肅宗 18년(1698)에 조성한 것으로 8각 원당형圓堂形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부도탑浮圖塔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탑의 자리는 닭이 알을 품는 형국이라 하며 숙종 9년(1693)에 홍연암에서 도금불사鍍金佛事를 거행할 때 서기瑞氣가 가득 차더니 공중에서 영롱한 구슬이 떨어졌는데 유리와 같은 광채를 내었다.
비구 석겸釋謙 등이 대원大願을 세우고 이 탑을 쌓고 구슬을 간직했다.
해수관음보살상
산등성이를 넘어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면 해수관음보살상으로 가는 길목이 나타난다.
넓고 긴 골 계단을 오르면 불교용품을 파는 선물가게와 거북상 등 위에 해수관음 조성 연기비緣起碑가 음각되어 있다.
5년간에 걸쳐 무려 750톤의 석재를 사용한 낙산사의 해수관음입상海水觀音立像은 높이 16m, 둘레 3.3m, 좌대의 넓이 6m로서 단일불상으로는 동양 최대이며 좌대의 앞부분은 쌍용상, 뒷부분은 비천상飛天像, 양옆으로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 한 송이 연꽃봉오리 위에 성상을 안치하였다.
관음상은 왼손에는 감로수병을 받쳐들고 오른손은 부드럽게 주름진 감미로운 곡선을 그리며 늘어뜨린 천의天衣 자락을 살짝 잡고 있다.
미간眉間에는 백호白毫를 박아 온누리에 퍼지는 자비의 광명을 상징하고 있다.
중생의 아픔과 번뇌를 감싸는 듯한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망망한 동해를 지그시 굽어보고 있다.
해변가 쪽으로 나서면 저 아래 의상대 지붕과 관음송이 보인다.
신성봉의 해수관음상에서 내려와 의상대를 지나 후문 매표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른쪽 산정에 낙산비치호텔이 있다. 큰 돌로 쌓은 담장엔 담쟁이덩굴이 바람에 흔들린다.
낙산해수욕장은 주변의 빼어난 자연경관과 유적이 많아 동해안 제일의 해수욕장으로 명성이 높다.
긴 백사장과 송림으로 우거진 해안일대는 바다와 문화유적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보기 드문 명소다.
해수海水는 맑고 얕으며 조개가 많아 조개를 줍는 즐거움이 피서객들의 흥미를 돋운다.
맑은 남대천 하류의 담수가 흐르며 해수와 교차하여 해수욕장으로서 최적이다.
낙산해수욕장
해변가에 연인들의 즐거운 모습을 바라보면서 1300여년 전 한 여인의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이야기를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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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사와 선묘낭자 이야기
중국 송나라의 찬녕贊寧이 988년에 쓴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의상전에 선묘善妙 낭자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설화說話로 전해진다.
의상은 그의 속성俗性이 박씨로서, 신라의 서울 경주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뛰어났으며 자라는 과정에 그는 구도적求道的인 천성天性이 역력했다.
스무 살 때 마침 당나라에서는 화엄교학華嚴敎學이 한창이라는 소문을 듣고 원효법사와 함께 입당구법入唐求法의 길에 올랐다.
그들이 신라의 해안 당주계唐州界까지 와서 배를 구하여 바다를 건너려 할 때 큰 비를 만났다. 그들은 길가의 움집으로 들어가 잠간 비를 피했는데 이튿날 깨어보니 그곳은 움집이 아니라 옛 무덤이며 옆에는 해골이 뒹굴고 있었다.
그 다음날도 하늘은 시커멓게 뒤덮이고 땅은 질어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바위틈의 벽에 기대어 하룻밤을 더 보내는데 별안간 귀신이 나타나 놀라기도 하였다.
원효가 탄식을 하며, “전날에는 무덤을 토굴이라 생각하고 잤는데 편안히 잘 수 있었고, 오늘밤에는 그곳을 피해 잤는데 귀신이 넘나드는 변을 당했다.
생각에 따라 갖가지 일이 생기고, 생각을 없애니까 토굴이니 무덤이니 하는 구별이 없어진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마음가짐 하나 탓이다.
이 마음 외에는 또 무슨 진리가 있으리요, 나는 당으로 건너가지 않겠소”라고 한 것이 이때의 일이다.
원효가 짐을 메고 다시 신라를 향해 돌아설 때 의상은 홀로 죽음을 무릅쓰고 유학길을 떠났다.
총장總章 2년(669)에 상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 해안에 도달했다.
의상은 한 신도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집에는 선묘善妙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그녀는 의상의 용모가 매우 뛰어남을 보고 갑자기 도심道心을 일으켜 그 앞에서 다음과 같이 대원大願을 발發했다.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스님께 귀명歸命하겠습니다.
대승大乘을 배워 익히고 대사大事를 성취하겠습니다.
제자는 반드시 시주施主가 되어 스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생활품을 바치겠나이다.”
의상은 그 후 장안 종남산長安終南山에 있는 지엄삼장知儼三藏에게로 가서 화엄학華嚴學을 배웠다.
그때 동문에는 당나라의 유명한 법장法藏, 나중에 강장국사康藏國師도 있었다.
공부를 끝내자 돌아가 전법傳法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의상은 고국 신라로 돌아가는 먼 길에 올랐다.
다시 문등현文登縣에 이른 그는 그 신도의 집을 찾아 그동안 베풀어준 갖가지 편의에 사의를 표명했다.
의상대사를 선창가의 길에서 보았다는 소문을 들은 선묘낭자가 미리 의상을 위해 준비한 법복法服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집기什器들을 함에 가득 넣어 해안에 도달했을 때 의상의 배는 이미 멀리 떠나고 있었다.
그녀는 주문을 외우며 “나의 참된 본심은 법사를 공양供養하는 일입니다.
원하옵건대 이 옷함이 저 배에 닿기를” 하고 옷함을 물결 속에 던졌다.
때마침 질풍이 불더니 그 옷함을 새털이 날리듯 의상이 탄 배에 닿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또 맹세하기를, “내 몸이 변해서 대룡大龍이 되기를 바라옵나이다.
그래서 저 배가 무사히 신라 땅에 닿아 스님이 법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비옵니다.” 하고 몸을 바닷속에 던져버렸다.
그 원력願力이 굽힐 수 없는 것임을 알았는지 신이 감동하여 과연 원대로 해주었다.
이 용은 혹은 떠올랐다, 혹은 물속에 잠겼다 하며 그 배 밑을 부축하여 의상을 무사히 신라의 바다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귀국한 후 의상은 산천을 두루 편력遍歷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먼지나 백제의 바람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찾아 “여기야말로 땅이 신령하고 산이 수려하니 참으로 법륜法輪을 굴릴 만한 곳이다.
권종이부(權宗異部다른 잘못된 주장을 하는 종파)의 무리들이 5백 명이나 모여 있을 까닭이 무엇이냐”라고 하였다.
의상은 또 마음속 깊이 대화엄大華儼의 가르침은 복되고 선한 곳이 아니면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때에 선묘가 항상 따라다니며 의상을 지켜주었다.
의상의 이러한 생각을 알고 선묘대룡이 허공 중에 대신변大神變을 일으켜 커다란 바위로 변했다.
일리一里나 되는 바위가 되어 가람伽藍의 지붕 위에서 떨어질까 말까 하는 모양을 하였다.
그곳의 군승群僧들은 소승小乘에 집착한 무리들이었는데 그 돌을 보고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의상은 이 절에 들어가 겨울과 여름에 화엄경華嚴經을 강講했다.
특별히 부르지도 않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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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고승전宋高僧傳에 전해오는 의상과 선묘, 그리고 부석사浮石寺의 창건에 얽힌 설화다.
부석사 무량수전 우측에 부석浮石이라 쓴 그 바위가 떠서 날아갈 듯 놓여 있고 좌측엔 애틋한 이국의 낭자의 혼을 기리기 위한 선묘각이 있다.
일제시대 부석사를 보수할 때 무량수전 밑에 묻혀있는 석룡石龍이 발견되었다.
그 꼬리부분이 묻혀 있는 이 석룡은 선묘화룡善妙化龍의 설화를 더 현실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세속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종교적인 지고지순의 사랑으로 승화되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님을 향해 끝까지 돕겠다는 자비의 사랑이 세세생생世世生生(불교에서 몇 번이고 다시 환생還生함을 이르는 말)에 스님께 귀명歸命하여 대승大乘을 배워 익히며 대사大事를 성취하겠다는 선묘낭자의 맹세가 천 년의 향을 사르고 있다.
원통보전 들어가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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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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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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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타전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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