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슬은 기찻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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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슬은 기찻길
- 노래 : 나훈아
- 작사 : 김관현
- 작곡 : 홍현걸
- 앨범 : 녹슬은 기찻길 (1975.01.20)
- 부제 : 철마는 달리고 싶다
휴전선 달빛아래 녹슬은 기찻길
어이해서 핏빛인가 말 좀 하렴아
전해다오 전해다오 고향 잃은 서러움을
녹슬은 기찻길아
어머니 정 그리워 우는 이 마음
대동강 한강물은 서해에서 만나
남과 북에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전해다오 전해다오 고향 잃은 서러움을
녹슬은 기찻길아
너처럼 내 마음도 울고 있단다
경의선
경의선은 서울과 평안북도 신의주를 잇는 총 518.5km의 복선철도로, 1904~1906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해방 당시의 영업구간은 706km에 달했다.
경의선은 경부선과 연결되어 우리나라 관서 지방을 관통하는 종관철도(縱貫鐵道)로서 역할을 했으며, 일제의 지배와 대륙침략을 위한 간선철도로서 수많은 지선이 연결되어 운수 교통량이 전국 철도 중 가장 많았다.
신의주에서 압록강철교를 건너 만주로 연결되나, 지금은 남북분단으로 서울특별시 용산구의 서울역과 경기도 파주시의 도라산역을 잇는 철도 노선만 운행하고 있다.
남측의 경의선은 문산-임진강-도라산-군사분계선까지의 12km 철도이며, 북측은 군사분계선-판문-손하-개성까지의 15.3km로 총 27.3km의 철도이다.
또 분단 이후에는 서울역에서 군사분계선까지를 경의선이라 부르게 되었다.
북한은 경의선이란 이름 대신 군사분계선에서 평양역까지를 평부선, 평양역에서 신의주청년역까지를 평의선이라 부른다.
경의선의 형성
경의선은 1902년 기공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1896년 프랑스 피브릴(Fives Lile)사가 부설권을 얻었으나 자금조달이 어려워 1899년 부설권을 상실하였다.
이어 1899년 박기종(朴琪淙)이 주도하는 대한철도회사가 특허를 얻었다가 또 다시 실패하자, 1900년 조정은 정부기관이었던 내장원(內藏院)에 서부철도국을 두고 서울~개성 간 선로측량을 시작했다.
당초 계획은 서울~개성 간 노선을 먼저 개통시키고 자금이 확보되는 대로 연장키로 하였는데, 당시 정부의 착공에도 일본과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경의선 부설에 관여했다고 한다.
이처럼 경의선은 1890년대부터 1910년까지 한반도와 만주에서 지배권을 확립하려는 치열한 세력다툼의 대상이었다.
러시아와 일본이 각축의 중심에 있었고 프랑스와 영국이 그들을 도왔으며, 그것을 둘러싼 열강의 갈등과 대립은 결국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러일전쟁 후의 경의선
러일전쟁이 일어난 후 보름 후인 1904년 2월 21일 일본은 서울~신의주 간 군용철도 부설을 위한 임시 군용철도감부를 설치하고 감부 소속 철도대대를 통해 3월 2일 불법으로 경의선 부설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동년 3월 12일 정부는 일본의 강요에 못 이겨 50년간의 임대조약을 맺고 일본에 경의선의 부설권을 내어주고 말았다.
부설권을 빼앗은 일본은 군인과 군수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급하게 공사를 진행시켰고, 실제 답사는 커녕 5만 분의 1 지형도로만 위치를 결정하고 측량을 하여 공사를 강행하였다.
1904년 3월 용산~개성 간, 4월 개성~평양 간, 6월 평양~신의주 간 노반공사에 착수하고 10월에 용산~임진강 간 철도건설을 위한 임시 열차가 운행되는 등 공사는 급속도로 진행되어 마침내 1905년 1월 평양~신의주 간 철도가 완성되었다. 이어 1906년 3월 난공사 지역인 청천강철교 준공을 끝으로 전선에 걸쳐 열차가 운행되었다.
경의선 건설에는 단 733일이 소요되었고 하루 평균 730m의 선로를 부설하는 등 졸속공사가 되었다. 철도용 부지는 무료로 강점하였으며 공병대를 투입하여 경비도 경감되는 등 경의선은 일본의 군사상 목적으로 급조되었다.
남북분단 이전의 경의선
경의선이 개통된 이후 1908년에는 신의주~부산 간 경부철도에 한국 최초의 급행열차인 융희호(隆熙號)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그 후 1911년 압록강 철교가 완공되어 중국 만주를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국제 철도 노선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서울역을 기점으로 신촌을 지나 가좌동에서 합류하는 노선이 개통되었고, 1943년에는 평양~신의주 구간이 복선화되었다.
광복 후 남북분단이 되었지만 열차는 계속 운행을 했다. 그러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문산~개성 간 운행이 중단되었고, 남북 간 철도는 이때부터 끊어지게 되었다.
경의선 복원 공사
휴전협정 후 대한민국에서는 서울~문산 구간만 관할하게 되었고, 2003년 12월 복원공사로 도라산역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경의선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에서만 사용하고 있으며, 북측은 도라산~신의주 구간을 2개로 나뉘어 평양역~도라산역 간 철도는 평부선, 평양역~신의주역 간 철도는 평의선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2006년 경의선과 동해북부선의 시험 운행이 계획되었지만 북한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가 2007년 재협상을 거쳐 5월 17일 경의선 남북 연결 구간인 문산~개성 간 시험 운전이 이루어졌다.
또 동년 12월부터는 남한의 문산역과 북한의 판문역을 잇는 개성공단 전용 화물열차가 전기운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2008년 11월 28일 북한의 일방적인 통보로 운행이 중단되어 오늘에 이른다.
임진강역
경기도 파주군 신속면 지역으로 임진나루터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운천면의 상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임진리라 하였다. 임진골이라고도 한다.
휴전선에서 남쪽으로 7km 떨어진 임진각은 6.25 전쟁의 비통한 한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실향민을 위한 망배단, 미얀마 아웅산 순국외교사절 위령탑, 한국전쟁의 대표 유산으로서 50여년 만에 개방이 된 자유의 다리와 한반도의 지형을 본 딴 통일연못, 평화의 종, 미국군 참전기념비 등을 볼 수 있다.
임진강역(臨津江驛)은 2001년 9월 30일 영업을 시작하였으며, 도라산역에 가기 위해서는 이 역에서 민통선 출입 수속을 받아야 한다.
임진각관광지
임진각관광지는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민족대립으로 인한 슬픔이 아로새겨져 있는 곳이다.
임진강지구 전적비, 미국군 참전비등 각종 전적비가 있으며, 남북 분단 전 한반도 북쪽 끝 신의주까지 달리던 기차가 이곳에 멈추어 전시되고 있다.(이곳의 임진철교는 2개의 다리가 나란히 있었으나 전쟁 시 하나는 파괴되어 철교의 교각만 남아 전쟁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음)
이곳에는 망배단이 있는데 망배단은 휴전선 북쪽에 고향을 가진 실향민들이 매년 설날과 추석 때나 가족이 보고 싶을 때에 고향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이곳에서 이북에 계신 부모, 조부모에게 배례하는 장소이다.
소식이 끊겨 생사도 불명확한 가족을 애타게 찾는 이산가족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이다. 이곳은 분단의 아픔을 되새기며 통일을 염원하는 통일안보관광지로 매년 수백만 명의 내·외국인이 방문하고 있다.
■ 통일연못
통일연못은 민간인이 자유롭게 갈 수 있는 최북단에서 남북 이산의 한을 달래고 통일을 염원하는 장소로 제공하고자 조성하였으며, 연못의 규모는 가로 12m, 세로 36m, 바닥 면적이 116평으로서 한반도 모양의 단일연못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 철마는 달리고 싶다
판문점 일원에 중단된 경의선 철도를 상징하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 열차를 1930년대 실제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 자유의 다리
자유의 다리는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 광장 앞 망배단 뒤편에 놓인 다리로 1953년에 한국전쟁 포로 12,773명이 자유를 찾아 귀환하였기 때문에 명명된 다리이다.
원래 경의선 철교는 상·하행 두 개의 교량이 있었으나 폭격으로 파괴되어 교각만 남아 있었는데 전쟁 포로들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서쪽 교각위에 철교를 복구했고 그 남쪽 끝에 임시교량을 가설했다. 당시에는 포로들이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와서 걸어서 자유의 다리를 건너왔다고 한다.
자유의 다리는 6경간(經間)으로 이루어진 목조 평교(平橋)형식으로 길이는 83m, 폭은 4.5~7m, 높이는 8m 내외이다. 순수한 목구조는 아니고 인장력을 많이 받는 부분에 철재를 병용하여 만든 혼합 구조이다. 통나무가 4개씩 4열로 세워진 교각 위에 사각 받침목과 I형 강(鋼)으로 만든 철제 보카 井자형으로 짜올려지고 그 위에 장선(長線)이 놓인 후 나무로 만든 상판이 올려져 마감되었다.
구조적인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수평재와 가새가 많이 사용되었다. 자유의 다리는 임시로 가설한 교량이므로 건축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의 대표적인 유산이라 할 수 있다.
■ 평화의 종
임진각 높은 곳에 북녘 땅을 굽어보며 새 천년의 우렁찬 소리를 토해 낼 『평화의 종』은 인류평화와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900만 경기도민의 의지를 모아 건립되었다.
21세기를 상징하는 무게 21톤, 높이 3.4m, 지름 2.2m 규모로서 2000년 1월1일 0시에 21번 타종되었다. 종각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사모지붕의 목조구조로서 면적은 21평, 높이는 12.2m이다.
■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등록문화재 제78호)
이 기관차는 한국전쟁 중 피폭·탈선된 후 반세기 넘게 비무장지대에 방치되어 있었던 남북분단의 상징물이다. 2004년 아픈 역사의 증거물로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로 등록된 후 포스코의 지원으로 녹슨 때를 벗겨 내고 역사교육자료로 활용하고자 하는 경기도(경기관광공사)의 적극적 의지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당시 이 열차를 운전했던 기관사(한준기, 1927년생)의 증언에 따르면,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던 도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황해도 평산군 한포역에서 후진하여 장단역에 도착했을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 기관차에 있는 1,020여개의 총탄 자국과 휘어진 바퀴는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 관광지내 전적기념물
● 미국군 참전비
- 건립년월일 : 1975.10.3.
- 기념내용 · 건립유래 : 한국전쟁기간 동안(1950-1953) 미국군이 참전하여 고귀한 희생과 빛나는 업적을 같이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비문내용 : 대한민국은 전쟁기간(1950-1953)동안 미국의 아들들이 바친 고귀한 희생과 업적을 기리며 그들의 영령을 같이 추모하기 위하여 여기에 비를 세워 기념하노라.
- 모형 : 기간 0.12m, 비 높이 0.8m로 비 주변 사방에 화강석 조형물이 둘러져 있고 미국주 깃대 50대가 있다.
● 임진강지구전적비
- 건립년월일 : 1979.12.30.
- 기념내용 · 건립유래 : 한국전쟁 당시의 격전지인 임진강지구에 전적지를 개발함으로써 국가 안보의식을 제고하고 반공교육의 산 자료, 건전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함에 있다.
- 비문내용 : 서부의 요충지 임진강은 남북을 잇는 관문이요, 혈맥이다. 여기에 공산군이 화살을 꽂아 4년, 제1사단 해병 제1전투단 및 유엔군은 자유와 평화를 찾기 위해 몸을 던져 사신을 지켰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을 영원히 혈맹의 고혼을 받은 채 통일의 그 날을 지켜볼 것이다.
- 모형 : 철골 세변위에 화강석을 붙였고 형 위에 자유를 상징하는 남녀 모형이 있다.
● 미 제2사단 6.25 참전비
- 건립년월일 : 1981.11.24.
- 기념내용 · 건립유래 : 한국전쟁기간 동안(1950-1953) 미제 2보병사단 장병들이 자유를 위하여 싸우다 전사한 전우들이 고귀한 희생과 빛나는 업적을 같이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비문내용 : 미제 2보병사단 자유를 위하여 전사한 용사들을 위하여
- 모형 : 검은색 화강암 비 높이 2.25m .
● 버마 아웅산 순국외교사절 위령탑
- 건립년월일 : 1984.10.5.
- 기념내용 · 건립유래 : 버마아웅산 폭발사건으로 희생된 순교외국 사절 및 공식수행 원 17위의 영령을 추모하고 고혼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탑을 건립하여 국민의 반공, 호국의지를 다지는데 있다.
- 비문내용 : 이 땅의 비극적 분단시대의 또 하나의 민족적 참사가 북한 공산집단에 의하여 저질렀으니 1983.10.9 낮 12:58분 서남아 대양주 순방 첫 방문지인 버마아웅산 국립묘소에서 저들이 밀파한 대통령 시해단에 의해 참배를 대기 중이던 17명의 외교사절 및 수행원이 일시에 희생당하는 참변을 빚었던 것이다.
- 모형 : 탑 17m, 탑신, 계단 17개로 되어 있으며 중앙1개 지주탑명 조각 4기의 청동군상은 외교를 통한 국력신장, 민족화합, 조국번영, 승천영생을 나타내고 있다.
도라산역
임진강역의 연계관광매표소에서 출입수속을 하고 버스연계관광 티켓을 끊으면 버스는 임진각을 지나 통일대교에 도착하여 출입국 통과절차를 거친 후, 도라산역에 이른다.
도라산역은 대한민국의 최북단 마지막역이자, 통일을 여는 첫 번째 역이다.
지금 이곳은 남북이 갈라진 38선을 지키기 위하여 정상에 전망대를 설치 국군들이 수호하고 있으며, 제3땅굴, 도라산전망대와 아울러 실향민, 외국인 등 여러 지역 관광객들이 자주 찾아오고 있다.
도라산에는 예로부터 이와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고려 태조는 왕건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이하게 하고 유화관(柳花官)을 하사하였으며, 정승을 봉하는 한편 경주를 식음으로 하여 사심관(事審官)을 파견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낙랑공주는 비운을 맞게 된 경순왕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저 도라산 중턱에 암자를 짓고 머물게 하였는데 영원히 이곳을 지키겠다는 뜻에서 영수암(永守菴)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경순왕이 조석으로 이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을 사모하고 눈물을 흘리었다 하여 도라산(都羅山)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고려 경종 3년(935)에 경순왕이 돌아가시니 고랑포 뒷산 아늑한 골짜기 남향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안장되었으며 낙랑공주는 영수암이 훼손함에 따라 아담하게 새로 절을 건립하여 경순왕의 화상을 모시고 명복을 기원하는 한편 영원히 번창하라는 뜻에서 창화사(昌化寺)라 호칭하였다고 하며 조선조 말까지 임갑진 스님이 수호 관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조선조 개창 이후 도라산 마루에 봉수대를 설치, 군인들을 주둔시키고 국난 시에는 봉화 신호로 송도와 파주 봉수대를 거쳐 한양으로 소식을 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도라전망대
‘분단의 끝 통일의 시작’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는 통일전망대를 바라보고 있자면 멀게만 느껴졌던 분단의 현실이 직접 피부로 다가온다.
이곳에는 북한을 보려는 외국인 관광객들로 가득하여 우리나라가 아닌 듯한 착각마저 불러온다.
그 영향에서인지 이곳을 지키는 군인들마저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다.
도라전망대는 송악산 OP 폐쇄에 따라 대체 신설되었으며, 북한의 생활을 바라볼 수 있는 남측의 최북단 전망대이다.
개성의 송학산, 김일성 동상, 기정동, 개성시 변두리, 금암골(협동농장) 등을 망원경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관람석 500석, VIP실, 상황실, 주차장(30~40대)등의 부대시설이 있으며, 일반에게는 1987년 1월부터 공개되었다.
제3땅굴
1978년 아군에게 발견된 제3땅굴은 문산까지의 거리가 12km, 서울까지의 거리는 52km지점에 있다. 폭 2m, 높이 2m, 총길이는 1,635m로 1시간당 3만명의 병력이동이 가능하다.
북한은 이 땅굴이 적발되자 남한에서 북침용으로 뚫은 것이라고 억지를 쓰기도 하였는데 땅굴 내부 갱도를 살펴보면 굴을 뚫을 때의 폭파흔적이 남쪽을 향하고 있어 북한의 주장이 허구임을 알 수 있다.
땅굴체험은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레일을 타고 내려가는 방법과 직접 걸어서 내려가는 방법이 그것이다.
헬멧을 단단히 쓰고 땅굴에 접어들면 생각보다 좁은 공간에 두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단단한 암벽층을 뚫고 파놓은 땅굴은 허리를 숙이고 낮은 보폭으로 이동해야할 정도로 협소하다.
제3땅굴은 내부 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니 유의하도록 하자.
2002년 5월 31부터는 셔틀 엘리베이터 최첨단 시스템을 갖춘 DMZ 영상관, 상징조형물, 기념품판매장등의 시설이 설치되어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JSA 안보견학관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해마루촌을 둘러본 후, TV나 영화에서만 보던 공동경비구역 JSA에 다다른다.
엄격한 출입 통과 절차를 거치면 JSA대대가 주둔 중인 캠프 보니파스에 도착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JSA 안보견학관.
1층에는 영상전시실과 기념품 판매점이 있고, 2층은 박물관으로 조성되어 있다.
견학관 내에는 휴전회담과 미루나무 도끼사건, 80년대 소련기자 망명 시 벌어진 총격전 등 생생한 사진과 자료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시선을 뗄 수 없는 정전협정 조인문. 분단이라는 현실을 더욱 절절하게 느끼게 하는 이 종이 한 장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판문점
JSA대대 측의 주의사항을 숙지하고 출입증을 눈에 띄는 곳에 붙인 후에야 판문점을 갈 수 있다. 가는 길에는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는 대성동 마을의 풍경을 볼 수 있다.
대성동 마을과 가까운 북한의 기정동 마을에는 국기 게양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하늘을 찌를 듯 높게 걸린 모습이 눈에 띈다.
이는 상대보다 높은 국기 게양대를 만들기 위해 경쟁을 한 끝에 이렇듯 높아졌다고 한다.
이윽고 도착한 판문점.
침묵 속에 흐르는 긴장감과 위압감은 대단하다.
정면으로 보이는 파란 건물이 우리나라에서 관리하는 회담장이며, 모두 3동이 설치되어 있다.
또 파란 건물을 마주보고 선 3동의 은색 건물은 모두 북한에서 관리하는 건물이다.
주변으로는 양측이 서로를 감시하는 초소들이 인접해 있다.
정면 계단 위로 보이는 것은 북측의 판문각이다. 영화나 TV에서 많이 보아왔지만 눈앞에 있음에도 마치 그림을 보듯 멀게만 느껴진다.
회담장에는 유엔기와 마이크가 놓인 테이블과 의자만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창밖으로 볼록 튀어나온 시멘트블록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남북한의 경계선이다. 이 평범한 구조물이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판문점 안쪽에는 미루나무 도끼 사건의 현장이 아직도 남아있다.
당시 북한군 초소에 둘러싸인 아군초소를 관측하는 데 방해되는 미루나무를 제거하던 중 북한군이 돌연 도끼로 공격을 하여 당시 중대장으로 있던 보니파스 대위와 소대장 등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미국과 한국은 대대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미루나무를 절단해버렸고, 6.25전쟁 이래 전쟁의 현실이 피부로 다가온 일촉즉발의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이 바로 이때였다.
이후 JSA 대대 주둔기지의 명칭이 캠프 보니파스로 변경된 것도 죽은 보니파스 대위를 기리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