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드러진 메밀꽃이 온 마을을 하얗게 수놓은 이곳 창동리는 이효석의 삶과 문학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그의 행적을 따라 이효석 생가에서 출발한 발걸음은 유년시절을 지나 많은 작품 활동을 통해 자신만의 세상을 펼쳤던 푸른 집, 그리고 문학 혼을 엿볼 수 있는 이효석문학관과 효석문화마을, 소설 속 배경이 되었던 물레방앗간을 거쳐 흥정천에 이른다.
효석은 1914년 8세 때 외학을 하게 되어 봉평에서 100리가 떨어진 평창의 학교까지 걸어서 이동했다. 이때의 교통수단은 우마차 아니면 도보뿐이었다.
어린 효석은 이 길을 따라 자연을 품은 집에서 나와 남안리 마을을 거쳐 당시 봉평천, 즉 현 흥정천에 다다랐다.
여기에서는 좌편 강변에 있는 동리 물레방아를 만났고, 흥정천 징검다리를 건너 봉평의 성황당을 지나면서 봉평의 본 마을 창동리에 들어와 상가와 주점, 즉 봉평장터 거리를 뚫고 시내를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중 충주집(훗날 ‘메밀꽃 필 무렵’의 작품 속에 나오는 주점)도 지나왔었다고 한다.
이효석생가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가산 이효석(1907~1942) 선생이 나고 자란 생가를 재현한 곳이다.
실제 이효석의 생가터는 봉평면의 창동리 서남쪽에 있는 성황당을 지나 봉평마을 건너 쭉 빠진 협곡의 마을 중간쯤 되는 우경산 밑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있다.
현재 생가터의 건물은 이효석 선생 출생 당시의 모습을 잃은 상태이며, 사유지로 부지확보가 어려워 지역 원로들의 고증을 바탕으로 이곳에 생가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원래 생가 앞으로는 작은 들이라고 할 수 있는 비옥한 전답이 펼쳐져 있었고, 생가 뒤편 언덕에는 밤나무 몇 그루와 돌배나무 한 그루가 큰 나무로 서 있었으며, 앞마당에는 물푸레나무와 단풍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었다 한다.
생가를 중심으로 우편에 사립문이 있어 마을로 나아가는 길이 있었으며, 앞마당을 지나 좌편 측면으로 돌아가면 우물이 있었다.
말하자면 이효석의 생가는 전형적인 산촌의 반가라 할 수 있어서 운치가 잘 어울리는 집이었다.
효석은 이러한 집에서 산촌의 자연을 뼈마디에 새기며 8세에 이르렀고, 1914년 8세 때부터는 군 소재지 평창 공립보통학교(현 평창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집까지 100리를 걸어 다녔다.
가는 길
마을의 기념품판매장을 지나 우회전하면 당나귀장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얼마 가지 않아 전방에 오롯이 자리한 집 한 채를 볼 수 있다. 바로 저곳이 이효석이 살던 생가를 복원한 곳이다.
이정표 옆 실개천이 흐르는 나무다리를 건너고 소담스런 철쭉 꽃밭 사잇길을 걷고 있노라면 8살짜리 야무진 꼬마 이효석이 백리길 학교까지 바지런히 가기 위해 당장에라도 집 앞에서 달려 나올 것만 같다.
안채
마당으로 들어서면 야트막한 안채가 정면에 자리해 있다.
소박한 초가로 구성돼 있지만 정면 4칸의 단단한 모양새가 한창 영근 산록과 어우러져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안채에는 창호문 3개가 달려 있는데, 이효석의 숨결을 쫓아 이곳을 찾은 객들의 호기심어린 손장난으로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다.
이 때문인지 이효석 선생을 만나고픈 사람들의 바람은 꼭 한번쯤은 이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고야 만다.
머릿 속에 그리던 그 모습은 남아있지 않지만, 아닌 걸 알면서도 들여다보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이효석 선생은 언제고 자리해 있으리라.
사람들은 문 앞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먼 풍경을 바라보며 아쉬운 마음들을 달랜다.
외양간
안채 오른쪽으로는 외양간이 보인다.
태백산맥 줄기를 따라 분포하는 강원도지방 외양간의 배치와도 같이 이곳 외양간도 안채의 앞쪽 ‘ㄱ’자 모양으로 꺾어지게 설치되어 있다.
이효석 가족의 생계를 지켜주었을 가축은 남아있지 않지만, 부엌에서 효석의 어머니가 여물을 끓여 내오고 효석이 먹이를 주는 평화로운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바깥채
안채 왼쪽으로는 바깥채가 자리해 있다.
추녀 밑으로는 말린 옥수수와 광주리가 걸려 있고 옆으로는 멍석까지도 볼 수 있다.
방 하나와 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변은 짚단으로 둘러싸여 있다.
뒷간
바깥채 바로 뒤편으로는 한 평 남짓한 뒷간이 침묵하고 있다.
발 저리도록 쪼그리고 앉아 어둠이 물러가기를 기도하던 시골 할머니댁에서의 어린 시절 추억에 미소가 번질만한 곳이다.
그러나 당시의 이곳은 벽 틈새로 새어 들어온 꽃샘바람과 사방십리 찾아든 산록의 기운, 또 이를 지키던 달빛이 깊은 어둠도 밝게 비추었을 것만 같다.
평양푸른집
이효석 선생은 1936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평양에서 생활하였는데, 바로 이곳이 평양에서 생활하였던 곳을 복원한 곳이다.
일식으로 지어진 이국적인 형태의 이 집은 세칭 ‘푸른 집’이라 불리었는데, 빨간 지붕으로 되어 있어 그 이름부터 많은 관광객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이효석 선생은 이곳에서 두 딸과 평양에서 얻은 아들까지 모두 다섯 식구로 단란한 가정을 꾸미며, <화분>, <고사리>, <개살구>, <장미 병들다>, <부록>, <영라>, <산정>, <벽공무한> 등 많은 후기 작품들을 썼다. 그러나 이 시기에 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역시 <메밀꽃 필 무렵>이다.
이효석 선생은 이곳에서 심미주의의 예술관에 심취해 어린 시절 생장환경이 되었던 고향의 자연에 예술을 부여하고 여기에 성이라는 주제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대작을 남겼다.
어여쁜 길 따라 사뿐히 자리한 ‘푸른 집’은 여전히 이국정취를 풍기며 유폐된 공간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창작활동을 펼쳤을 이효석 선생의 문학 혼을 그대로 품고 있다.
가는 길
이효석복원생가를 지나 언덕으로 난 외길을 따르면 저 멀리 빨간 지붕의 집 한 채가 보인다.
소담스런 들꽃들이 반기는 이 길은 주변 정취만큼이나 아름다워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또 길 따라 드문드문 놓인 전봇대는 옛 정취를 느낄 수 있게 외관을 꾸며놓아 정겨움을 더해주고 있다.
빨간 지붕의 ‘푸른 집’
일식으로 지어진 이 집은 세칭 ‘푸른 집’이라 불리었는데, 빨간 지붕으로 되어 있어 그 이름부터 많은 관광객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담쟁이넝쿨
평양푸른집의 외벽은 담쟁이넝쿨로 덮여있어 더욱 신비로움을 준다.
특히 가을이 되면 빨갛게 물든 단풍이 건물 전체를 덮어 더욱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이효석문학관
평양푸른집을 나와 다시 이효석복원생가와 주차장을 지나면 이효석문학관으로 길을 안내하는 언덕 위 책장 모형 출입구를 볼 수 있다.
출입구를 통과하여 쉬엄쉬엄 언덕을 오르면 고지 위에 평화로이 자리한 이효석문학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효석문학관은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가산 이효석 선생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문학전시실과 다양한 문학체험을 할 수 있는 문학교실, 학예연구실, 그리고 메밀자료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학관 내부에는 이효석 선생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볼 수 있도록 구성된 문학전시실, 1930년대 후반 평양 집 거실에서 찍은 이효석의 사진 한 장과 함께 재현한 창작실, 1930년대 봉평 장터와 문학 생애를 다룬 영상물 등을 통해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또한 허생원과 장돌뱅이들이 지친 하루의 여정을 풀던 주막인 충주집과, 동이가 허생원을 업고 건너던 개울과 섶다리, 그리고 봉평 장터 등 ‘메밀꽃 필 무렵’ 모형을 통해 소설 속 봉평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더불어 메밀자료실에서는 메밀의 가공과정과 메밀음식들을 소개하며, 문학교실에서는 단순히 작가가 상상하는 허구적 세계 뿐만 아니라 작가의 정신이 반영되고 그 시대의 삶과 문화가 반영된 작가의 숨결 그대로를 느껴볼 수 있다.
문학관은 아름다운 외관으로 유명하고 문학관에서 내려다 본 메밀꽃밭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기에 충분하다.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밭 언저리에 앉아 문학의 향기에 젖어보자.
■ 개관시간
● 성수기(5월 1일~9월 30일) : 오전 9시~오후 7시
● 비수기(10월 1일~4월 30일) : 오후 9시~오후 5시
■ 휴관일 : 비수기 시 매주 월요일, 설·추석 연휴 오전
■ 입장료
● 일반 : 어른 2,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 단체(20인 이상) : 어른 1,5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
● 군민 : 어른 1,000원, 청소년 750원, 어린이 500원
■ 무료입장
● 만 6세 이하 어린이
● 주민등록증을 소지한 65세 이상 노인
● 장애인복지법의 규정에 의한 장애인(증명소지자)
● 기념일별 무료입장 안내(매년)
- 5월 5일 어린이 날 : 어린이 무료입장
- 6월 6일 현충일 : 보훈 대상자 무료입장
- 10월 1일 국군의 날 : 군인 무료입장
- 10월 21일 경찰의 날 : 경찰관 무료입장
■ 홈페이지 : http://www.hyoseok.org
■ 문의 : 033-330-2700 (이효석문학관)
문학관 입구
잘 가꾸어진 길목을 지나면 이효석 선생의 책 모양으로 꾸며진 정문이 나오는데, 책모양의 정문을 통과하면 마치 그의 문학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하다.
이효석문학관
우리나라 단편문학의 백미‘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이자 가산 이효석 선생이 나고 자란 봉평에는, 흐드러지게 핀 메밀을 만나러 온 이들의 발걸음으로 왁자하다. 그리고 그 걸음 끝에 이효석문학관이 있다.
이효석문학관 내부
그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볼 수 있도록 구성된 문학전시실, 1930년대 후반 평양 집 거실에서 찍은 이효석의 사진 한 장과 함께 재현한 창작실, 1930년대 봉평 장터와 문학 생애를 다룬 영상물 등을 통해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 모형
허생원과 장돌뱅이들이 지친 하루의 여정을 풀던 주막인 충주집이 정겹고, 동이가 허생원을 업고 건너던 개울에는 섶다리, 그리고 봉평 장터 재현 등 소설 속 봉평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메밀자료실
메밀자료실에서는 메밀의 가공과정, 그리고 메밀음식들을 소개한다.
문학교실
문학작품에는 단순히 작가가 상상하는 허구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작가의 정신이 반영되고 그 시대의 삶과 문화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작가의 숨결이 더욱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듯한 봉평, 메밀꽃 흐드러지게 피는 소설 속 봉평으로 떠나보자.
효석문화마을
이곳 창동리 남안동은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이며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백미인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가산 이효석 선생이 출생한 마을이다.
가산 이효석을 기념해 조성된 효석문화마을은 마을을 감싸 안은 산자락과 마을 앞을 흐르는 강변이 어우러져 순수한 농촌마을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 지역 일대에는 메밀꽃 필 무렵의 작품 무대가 되었던 충주집 등을 비롯해 이효석 생가와 이효석 문학관을 조성하여 이효석의 생애를 느껴볼 수 있고, 마을 주변에는 메밀 음식점들이 즐비해 평창의 메밀음식을 맛볼 수도 있다.
물레방앗간
마을 입구 평창군종합관광안내소 옆에 복원된 물레방아이다.
이 물레방앗간은 이효석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의 실제 배경지로, 허생원이 성씨 처녀를 우연히 만나 정을 통한 곳이다.
허생원이 성처녀의 아들로 추측되는 동이를 만나 따뜻한 정을 느끼는 것이 <메밀꽃 필 무렵>의 전체 스토리라고 보면, 물레방아는 그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었던 중요한 동기가 된다. 그래서 문화마을 내에는 어딜 가나 물레방아가 꼭 있다.
물레방아는 아련한 추억을 되새김질이라도 하듯 내내 돌고 있다.
이 시설은 봉평이 국가로부터 ‘문화마을’로 지정됨에 따라 지난 1992년에 조성되었으며, 복원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복원 터의 지주가 이 터를 희사해 주어 복원은 더욱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효석생가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가산 이효석(1907~1942) 선생이 나고 자란 생가를 재현한 곳이다.
실제 이효석의 생가 터는 봉평면의 창동리 서남쪽에 있는 성황당을 지나 봉평마을 건너 쭉 빠진 협곡의 마을 중간쯤 되는 우경산 밑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생가 터의 건물은 이효석 선생 출생 당시의 모습을 잃은 상태이며, 사유지로 부지확보가 어려워 지역 원로들의 고증을 바탕으로 이곳에 생가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원래 생가 앞으로는 작은 들이라고 할 수 있는 비옥한 전답이 펼쳐져 있었고, 생가 뒤편 언덕에는 밤나무 몇 그루와 돌배나무 한 그루가 큰 나무로 서 있었으며, 앞마당에는 물푸레나무와 단풍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었다 한다.
생가 중심으로 우편에 사립문이 있어 마을로 나아가는 길이 있고, 앞마당을 지나 좌편 측면으로 돌아가면 우물이 있었다. 말하자면 이효석의 생가는 전형적인 산촌의 반가라 할 수 있어서 운치가 잘 어울리는 집이었다.
이 집에서 효석은 산촌의 자연을 뼈마디에 새기며 8세에 이르렀고, 1914년 8세 때부터는 군 소재지 평창공립보통학교(현 평창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집까지 100리를 걸어 다녔다.
이효석문학관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가산 이효석 선생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문학전시실과 다양한 문학체험을 할 수 있는 문학교실, 학예연구실, 그리고 메밀자료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학관 내부에는 이효석 선생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볼 수 있도록 구성된 문학전시실, 1930년대 후반 평양 집 거실에서 찍은 이효석의 사진 한 장과 함께 재현한 창작실, 1930년대 봉평 장터와 문학 생애를 다룬 영상물 등을 통해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또한 허생원과 장돌뱅이들이 지친 하루의 여정을 풀던 주막인 충주집과, 동이가 허생원을 업고 건너던 개울과 섶다리, 그리고 봉평 장터 등 ‘메밀꽃 필 무렵’ 모형을 통해 소설 속 봉평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더불어 메밀자료실에서는 메밀의 가공과정과 메밀음식들을 소개하며, 문학교실에서는 단순히 작가가 상상하는 허구적 세계 뿐만 아니라 작가의 정신이 반영되고 그 시대의 삶과 문화가 반영된 작가의 숨결 그대로를 느껴볼 수 있다.
문학관은 아름다운 외관으로 유명하고 문학관에서 내려다 본 메밀꽃밭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기에 충분하다.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밭 언저리에 앉아 문학의 향기에 젖어보자.
■ 개관시간
● 성수기(5월 1일~9월 30일) : 오전 9시~오후 7시
● 비수기(10월 1일~4월 30일) : 오후 9시~오후 5시
■ 휴관일 : 비수기 시 매주 월요일, 설·추석 연휴 오전
■ 입장료
● 일반 : 어른 2,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 단체(20인 이상) : 어른 1,5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
● 군민 : 어른 1,000원, 청소년 750원, 어린이 500원
■ 무료입장
● 만 6세 이하 어린이
● 주민등록증을 소지한 65세 이상 노인
● 장애인복지법의 규정에 의한 장애인(증명소지자)
● 기념일별 무료입장 안내(매년)
- 5월 5일 어린이 날 : 어린이 무료입장
- 6월 6일 현충일 : 보훈 대상자 무료입장
- 10월 1일 국군의 날 : 군인 무료입장
- 10월 21일 경찰의 날 : 경찰관 무료입장
■ 홈페이지 : http://www.hyoseok.org
■ 문의 : 033-330-2700 (이효석문학관)
이효석복원생가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가산 이효석(1907~1942) 선생이 나고 자란 생가를 재현한 곳이다.
실제 이효석의 생가 터는 봉평면의 창동리 서남쪽에 있는 성황당을 지나 봉평마을 건너 쭉 빠진 협곡의 마을 중간쯤 되는 우경산 밑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생가 터의 건물은 이효석 선생 출생 당시의 모습을 잃은 상태이며, 사유지로 부지확보가 어려워 지역 원로들의 고증을 바탕으로 이곳에 생가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원래 생가 앞으로는 작은 들이라고 할 수 있는 비옥한 전답이 펼쳐져 있었고, 생가 뒤편 언덕에는 밤나무 몇 그루와 돌배나무 한 그루가 큰 나무로 서 있었으며, 앞마당에는 물푸레나무와 단풍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었다 한다.
생가 중심으로 우편에 사립문이 있어 마을로 나아가는 길이 있고, 앞마당을 지나 좌편 측면으로 돌아가면 우물이 있었다. 말하자면 이효석의 생가는 전형적인 산촌의 반가라 할 수 있어서 운치가 잘 어울리는 집이었다.
이 집에서 효석은 산촌의 자연을 뼈마디에 새기며 8세에 이르렀고, 1914년 8세 때부터는 군 소재지 평창공립보통학교(현 평창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집까지 100리를 걸어 다녔다.
평양푸른집
이효석 선생은 1936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평양에서 생활하였는데, 바로 이곳이 평양에서 생활하였던 곳을 복원한 곳이다.
이효석 선생은 이곳에서 두 딸과 평양에서 얻은 아들까지 모두 다섯 식구로 단란한 가정을 꾸미며, <화분>, <고사리>, <개살구>, <장미병들다>, <부록>, <영라>, <산정>, <벽공무한> 등 많은 후기 작품들을 썼다. 그러나 이 시기에 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역시 <메밀꽃 필 무렵>이다.
이효석 선생은 이곳에서 심미주의의 예술관에 심취해 어린 시절 생장환경이 되었던 고향의 자연에 예술을 부여하고 여기에 성이라는 주제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대작을 남겼다.
어여쁜 길 따라 사뿐히 자리한 ‘푸른 집’은 여전히 이국정취를 풍기며 유폐된 공간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창작활동을 펼쳤을 이효석 선생의 문학 혼을 그대로 품고 있다.
이효석문학관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가산 이효석 선생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문학전시실과 다양한 문학체험을 할 수 있는 문학교실, 학예연구실, 그리고 메밀자료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학관 내부에는 이효석 선생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볼 수 있도록 구성된 문학전시실, 1930년대 후반 평양 집 거실에서 찍은 이효석의 사진 한 장과 함께 재현한 창작실, 1930년대 봉평 장터와 문학 생애를 다룬 영상물 등을 통해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또한, 허생원과 장돌뱅이들이 지친 하루의 여정을 풀던 주막인 충주집과, 동이가 허생원을 업고 건너던 개울과 섶다리, 그리고 봉평 장터 등 ‘메밀꽃 필 무렵’ 모형을 통해 소설 속 봉평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더불어 메밀자료실에서는 메밀의 가공과정과 메밀 음식들을 소개하며, 문학교실에서는 단순히 작가가 상상하는 허구적 세계 뿐만 아니라 작가의 정신이 반영되고 그 시대의 삶과 문화가 반영된 작가의 숨결 그대로를 느껴볼 수 있다.
문학관은 아름다운 외관으로 유명하고 문학관에서 내려다본 메밀꽃밭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을 만하다.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밭 언저리에 앉아 문학의 향기에 젖어보자.
효석문화마을
이곳 창동리 남안동은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이며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백미인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가산 이효석 선생이 출생한 마을이다.
가산 이효석을 기념해 조성된 효석문화마을은 마을을 감싸 안은 산자락과 마을 앞을 흐르는 강변이 어우러져 순수한 농촌 마을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 지역 일대에는 메밀꽃 필 무렵의 작품 무대가 되었던 충주집 등을 비롯해 이효석 생가와 이효석 문학관을 조성하여 이효석의 생애를 느껴볼 수 있고, 마을 주변에는 메밀 음식점들이 즐비해 평창의 메밀 음식을 맛볼 수도 있다.
물레방아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주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나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려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일세. 봉평서야 제일 가는 일색이었지. ― 팔자에 있었나부지.
날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달리 기다리는 놈팽이가 있는 것두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단 말야. 짐작은 대고 있었으나 성서방네는 한창 어려워서 들고날 판인 때였지. 한 집안 일이니 딸에겐들 걱정이 없을리 있겠나? 좋은 데만 있으면 시집도 보내련만 시집은 죽어도 싫다지 ― 그러나 처녀란 울 때같이 정을 끄는 때가 있을까. 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으나 걱정 있을 때는 누그러지기도 쉬운 듯해서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 -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 소설 ‘메밀꽃 필 무렵’ 中
봉평면 시가지에서 이효석 생가로 가는 봉평천 건너편 남안리 입구에 복원된 물레방아이다.
이 물레방앗간은 이효석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의 실제 배경지로, 허생원이 성씨 처녀를 우연히 만나 정을 통한 곳이다.
허생원이 성처녀의 아들로 추측되는 동이를 만나 따뜻한 정을 느끼는 것이 <메밀꽃 필 무렵>의 전체 스토리라고 보면, 물레방아는 그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었던 중요한 동기가 된다. 그래서 문화마을 내에는 어딜 가나 물레방아가 꼭 있다.
물레방아는 아련한 추억을 되새김질이라도 하듯 내내 돌고 있다.
이 시설은 봉평이 국가로부터 ‘문화마을’로 지정됨에 따라 지난 1992년에 조성되었으며, 복원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복원 터의 지주가 이 터를 희사해 주어 복원은 더욱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평창 푸른 집
이효석 선생은 1936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평양에서 생활하였는데, 바로 이곳이 평양에서 생활하였던 곳을 복원한 곳이다.
일식으로 지어진 이국적인 형태의 이 집은 세칭 ‘푸른 집’이라 불리었는데, 빨간 지붕으로 되어 있어 그 이름부터 많은 관광객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이효석 선생은 이곳에서 두 딸과 평양에서 얻은 아들까지 모두 다섯 식구로 단란한 가정을 꾸미며, <화분>, <고사리>, <개살구>, <장미병들다>, <부록>, <영라>, <산정>, <벽공무한> 등 많은 후기 작품들을 썼다. 그러나 이 시기에 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역시 <메밀꽃 필 무렵>이다.
이효석 선생은 이곳에서 심미주의의 예술관에 심취해 어린 시절 생장환경이 되었던 고향의 자연에 예술을 부여하고 여기에 성이라는 주제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대작을 남겼다.
어여쁜 길 따라 사뿐히 자리한 ‘푸른 집’은 여전히 이국정취를 풍기며 유폐된 공간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창작활동을 펼쳤을 이효석 선생의 문학 혼을 그대로 품고 있다.
이효석생가(터)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가산 이효석(1907~1942) 선생이 나고 자란 곳으로, 현재 건물은 이효석 선생 출생 당시의 모습을 잃은 상태이며, 사유지로 부지확보가 어려워 지역 원로들의 고증을 바탕으로 이곳에서 약 700m 떨어진 곳에 생가를 다시 복원하였다.
원래 생가 앞으로는 작은 들이라고 할 수 있는 비옥한 전답이 펼쳐져 있었고, 생가 뒤편 언덕에는 밤나무 몇 그루와 돌배나무 한 그루가 큰 나무로 서 있었으며, 앞마당에는 물푸레나무와 단풍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었다 한다.
생가 중심으로 우편에 사립문이 있어 마을로 나아가는 길이 있고, 앞마당을 지나 좌편 측면으로 돌아가면 우물이 있었다. 말하자면 이효석의 생가는 전형적인 산촌의 반가라 할 수 있어서 운치가 잘 어울리는 집이었다.
이효석 문학의 숲
이효석 문학의 숲은 그의 작품 〈메밀꽃 필 무렵〉의 내용을 토대로 조성한 테마공원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 등장인물인 허생원과 조선달, 그리고 동이를 조형물을 통해 곳곳에서 만날 수 있고, 소설 속 물레방앗간도 재현해 놓아 흥미를 더한다. 각각의 조형물 앞에는 그와 관련된 소설 속 구절이 새겨진 바위가 놓여 있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이효석문학의 숲은 자연과 문학작품이 하나 된 산책로로, 가벼운 산책을 하듯 걸으며 〈메밀꽃 필 무렵〉을 감상하고 소설 속 주인공들과 기념사진도 찍는 재미가 있다.
가산공원
현대문학사에 우뚝 선 가산 이효석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1,300평 부지에 가산의 동상과 문학비 등을 조성한 조형광장으로, 주변에는 벤치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어 쉬며 걸으며 그의 문학혼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시원하게 뻗은 나무 숲 사이로 아담하게 조성된 가상공원은 장돌뱅이 허생원도 잠시 쉬어갔음직한 곳이다.
공원 한 가운데 이효석 동상과 문학비는 그의 문학적 업적을 다시 새겨보게끔 해준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충주집>도 바로 이 가산공원 옆에 있다. 주위로 미로처럼 만들어진 산책로를 거닐면서 작은 숲에 내려앉은 자연의 숨소리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물레방앗간
평창군종합관광안내소 옆에 복원된 물레방아이다.
이 물레방앗간은 이효석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의 실제 배경지로, 허생원이 성씨 처녀를 우연히 만나 정을 통한 곳이다.
허생원이 성처녀의 아들로 추측되는 동이를 만나 따뜻한 정을 느끼는 것이 <메밀꽃 필 무렵>의 전체 스토리라고 보면, 물레방아는 그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었던 중요한 동기가 된다. 그래서 문화마을 내에는 어딜 가나 물레방아가 꼭 있다.
물레방아는 아련한 추억을 되새김질이라도 하듯 내내 돌고 있다.
물레방앗간 재현
이 시설은 봉평이 국가로부터 ‘문화마을’로 지정됨에 따라 지난 1992년에 조성되었으며, 복원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복원 터의 지주가 이 터를 희사해 주어 복원은 더욱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물레방앗간 내부
물레방앗간 내부에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허생원과 성씨 처녀가 금방이라도 나타날 듯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디딜방아와 주변에 쌓인 짚단이 당시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어둑어둑한 밤이지만 두 사람 머리 위를 비추었을 달빛만이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소설 속 물레방앗간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주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나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려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일세.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 팔자에 있었나부지.
날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달리 기다리는 놈팽이가 있는 것두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단 말야. 짐작은 대고 있었으나 성서방네는 한창 어려워서 들고날 판인 때였지. 한 집안 일이니 딸에겐들 걱정이 없을 리 있겠나? 좋은 데만 있으면 시집도 보내련만 시집은 죽어도 싫다지 ― 그러나 처녀란 울 때같이 정을 끄는 때가 있을까. 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으나 걱정 있을 때는 누그러지기도 쉬운 듯해서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 -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 소설 ‘메밀꽃 필 무렵’ 中
소설 메밀꽃 필 무렵
■ 내레이션 : 재능시낭송협회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려 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사람들은 거지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들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춥춥스럽게 날아드는 파리떼도 장난꾼 각다귀들도 귀치않다. 얼금뱅이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 생원은 기어코 동업의 조 선달을 낚우워 보았다.
'그만 걷을까?'
'잘 생각했네. 봉평 장에서 한 번이나 흐붓하게 사 본 일 있었을까. 내일 대화 장에서나 한몫 벌어야 겠네.'
'오늘 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껄.'
'달이 뜨렷다.'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조 선달이 그 날 산 돈을 따지는 것을 보고 허 생원은 말뚝에서 넓은 휘장을 걷고 벌려 놓았던 물건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무명 필과 주단 바리가 두 고리짝에 꼭 찼다. 멍석 위에는 천조각이 어수선하게 남았다.
다른 축들도 벌써 거진 전들을 걷고 있었다. 약빠르게 떠나는 패도 있었다. 어물 장수도 땜장이도 엿장수도생강 장수도 꼴들이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진부와 대화에 장이 선다. 축들은 그 어느 쪽으로든지 밤을 새며 육칠십 리 밤길을 타박거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장판은 잔치 뒷마당같이 어수선하게 벌어지고 술집에서는 싸움이 터져 있었다. 주정꾼 욕지거리에 섞여 계집의 앙칼진 목소리가 찢어졌다. 장난 저녁은 정해 놓고 계집의 고함 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생원, 시침을 떼두 다 아네.... 충줏집 말야.'
계집 목소리로 문득 생각난 듯이 조 선달은 비죽이 웃는다.
'화중지병이지. 연소패들을 적수로 하구야 대거리가 돼야 말이지.'
'그렇지두 않을걸. 축들이 사족을 못 쓰는 것두 사실은 사실이나, 아무리 그렇다곤 해두 왜 그 동이 말일세. 감쪽같이 충줏집으 후린 눈치거든.'
'무어 그 애숭이가 물건 가지고 낚었나 부지. 착실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그 길만은 알 수 있나... 궁리 말구 가보세나그려. 내 한턱 씀세.'
그다지 마음이 당기지 않는 것을 쫒아갔다. 허 생원은 계집과는 연분이 멀었다. 얼금뱅이 상판을 쳐들고 대어 설 숫기도 없었으나 계집 편에서 정을 보낸 적도 없었고, 쓸쓸하고 뒤틀린 반생이었다. 충줏집을 생각만 하여도 철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발빝이 떨리고 그자리에 소스라쳐 버린다.
충북집에서 소동
■ 내래이션 : 재능시낭송협회
충줏집 문을 들어서 술좌석에서 짜장 동이를 만났을 때에는 어찌 된 서슬엔지 발끈 화가 나버렸다. 상 위에 붉은 얼굴을 쳐들고 제법 계집과 농탕치는 것을 보고서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녀석이 제법 난질꾼인데 꼴사납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낮부터 술 처먹고 계집과 농탕이야. 장돌뱅이 망신만 시키고 돌아다니누나. 그 꼴에 우리들과 한몫 보자는 셈이지 동이 앞에 막아 서면서부터 책망이었다. 걱정두 팔자요 하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 상기된 눈망울에 부딪칠 때 결김에 따귀를 하나 갈겨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동이도 화를 쓰고 팩하게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허 생원은 조금도 동색하는 법 없이 마음먹은 대로는 다 지껄였다. 어디서 주서 먹은 선머슴인지는 모르겠으나, 네게도 아비 어미 있겠지. 그 사나운 꼴 보면 맘 좋겠다. 장사란 탐탁하게 해야 되지, 계집이 다 무어야 나가거라 냉큼 꼴 치워.
그러나 한 마디도 대거리하지 않고 하염없이 나가는 꼴을 보려니 도리어 측은히 여겨졌다. 아직도 서름서름한 사인데 너무 과하지 않았을까 하고 마음이 섬짓해졌다. 주제도 넘지 같은 술손님이면서두 아무리 젊다고 자식 낳게 되는 것을 붙들고 치고 닦아세울 것은 무어야 원. 충줏집은 입술을 쫑긋하고 술 붓는 솜씨도 거칠었으나 젊은애들한테는 그것이 약이 된다나 하고 그 자리는 조 선달이 얼버무려 넘겼다. 너 녀석한테 반했지. 애숭이를 빨면 죄 된다. 한참 법석을 친 후이다. 담도 생긴데다가 웬일인지 흠뻑 취해 보고싶은 생각도 있어서 허 생원은 주는 술잔이면 거의 다 들이켰다. 거나해짐을 따라 계집 생각보다도 동이의 뒷일이 한결같이 궁금해졌다. 내 꼴에 계집을 가로채서는 어떡할 작정이었누 하고 어리석은 꼬락서니를 모질게 책망하는 마음도 한편에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얼마나 지난 뒤인지 동이가 헐레벌떡거리며 황급히 부르러 왔을 때에는 마시던 잔을 그 자리에 던지고 정신없이 허덕이며 충줏집을 뛰어나간 것이었다.
'생원 당나귀가 바를 끊구 야단이에요.'
'각다귀들 장난이지 필연코.'
짐승도 짐승이려니와 동이의 마음씨가 가슴을 울렸다.
뒤를 따라 장판을 달음질하려니 게슴츠레한 눈이 뜨거워질 것 같다.
'부락스런 녀석들이라 어쩌는 수 있어야죠.'
'나귀를 몹시 구는 녀석들은 그냥 두지는 않는걸.'
나귀와 각다귀들
■ 내래이션 : 재능시낭송협회
반평생을 같이 지내 온 짐승이었다. 같은 주막에서 잠자고 같은 달빛에 젖으면서 장에서 장으로 걸어다니는 동안에 이십 년의 세월이 사람과 짐승을 함께 늙게 하였다. 까스러진 목 뒤 털은 주인의 머리털과도 같이 바스러지고 개진개진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꼽을 흘렸다. 몽당비처럼 짧게 쓸리운 꼬리는, 파리를 쫓으려고 기껏 휘저어 보아야 벌써 다리까지는 닿지 않았다. 닳아 없어진 굽을 몇 번이나 도려내고 새 철을 신겼는지 모른다. 굽은 벌써 더 자라나기는 틀렸고 닳아 버린 철 사이로는 피가 빼짓이 흘렀다. 냄새만 맡고도 주인을 분간하였다. 호소하는 목소리로 야단스럽게 울며 반겨한다.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니 나귀는 코를 벌름거리고 입을 투르르거렸다. 콧물이 튀었다. 허 생원은 짐승 때문에 속도 무던히는 썩였다. 아이들의 장난이 심한 눈치여서 땀 배인 몸뚱어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좀체 흥분이 식지 않는 모양이었다. 굴레가 벗어지고 안장도 떨어졌다. 요 몹쓸 자식들 하고 허 생원은 호령을 하였으나 패들은 벌써 줄행랑을 논 뒤요 몇 남지 않은 아이들이 호령에 놀라 비슬비슬 멀어졌다.
'우리들 장난이 아니우. 암놈을 보고 저 혼자 발광이지.'
코흘리개 한 녀석이 멀리서 소리를 쳤다.
'고 녀석 말투가'
'김 첨지 당나귀가 가버리니까 왼통 흙을 차고 거품을 흘리면서 미친 소같이 날뛰는걸. 꼴이 우스워 우리는 보고만 있었다우. 배를 좀 보지.'
아이는 앙돌아진 투로 소리를 치며 깔깔 웃었다. 허 생원은 모르는 결에 낯이 뜨거워졌다. 뭇 시선을 막으려고 그는 짐승의 배 앞을 가려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늙은 주제에 암샘을 내는 셈야, 저놈의 짐승이.'
아이의 웃음소리에 허 생원은 주춤하면서 기어코 견딜 수 없이 채찍을 들더니 아이를 쫓았다.
'쫓으려거든 쫓아 보지. 왼존잡이가 사람을 때려.'
줄달음에 달아나는 각다귀에는 당하는 재주가 없었다.
왼손잡이는 아이 하나도 후릴 수 없다. 그만 채찍을 던졌다.
술기도 돌아 몸이 유난스럽게 화끈거렸다.
'그만 떠나세. 녀석들과 어울리다가는 한이 없어. 장판의 각다귀들이란 어른보다도 더 무서운 것들인걸.'
조 선달과 동이는 각각 제 나귀에 안장을 얹고 짐을 싣기 시작하였다. 해가 꽤 많이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허생원과 봉평장
■ 내래이션 : 재능시낭송협회
드팀전 장돌이를 시작한 지 이십 년이나 되어도 허 생원은 봉평 장을 빼논 적은 드물었다. 충주 제천 등의 이웃 군에도 가고, 멀리 영남 지방에도 헤매이기는 하였으나 강릉쯤에 물건하러 가는 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군내를 돌아다녔다. 닷새만큼씩의 장날에는 달보다도 확실하게 면에서 면으로 건너간다. 고향이 청주라고 자랑삼아 말하였으나 고향에 돌보러 간 일도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 반날 동안이나 뚜벅뚜벅 걷고 장터 있는 마을에 거지반 가까웠을 때 지친 나귀가 한바탕 우렁차게 울면 더구나 그것이 저녁녘이어서 등불들이 어둠 속에 깜박거릴 무렵이면 늘 당하는 것이건만 허 생원은 변치 않고 언제든지 가슴이 뛰놀았다.
젊은 시절에는 알뜰하게 벌어 돈푼이나 모아 본 적도 있기는 있었으나, 읍내에 백중이 열린 해 호탕스럽게 놀고 투전을 하고 하여 사흘 동안에 다 털어 버렸다. 나귀까지 팔게된 판이었으나 애끗는 정분에 그것만은 이를 물고 단념하였다. 결국 도로아미타불로 장돌이를 다시 시작할 수밖에는 없었다. 짐승을 데리고 읍내를 도망해 나왔을 때에는 너를 팔지 않기 다행이었다고 길가에서 울면서 짐승의 등을 어루만졌던 것이었다. 빚을 지기 시작하니 재산을 모을 염은 당초에 틀리고 간힌이 입에 풀칠을 하러 장에서 장으로 돌아다니게 되었다.
모밀밭의 세사람
■ 내래이션 : 재능시낭송협회
호탕스럽게 놀았다고는 하여도 계집 하나 후려 보지는 못하였다. 계집이란 쌀쌀하고 매정한 것이었다. 평생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신세가 서글퍼졌다. 일신에 가까운 것이 라고는 언제나 변함없는 한 필의 당나귀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꼭 한 번의 첫 일을 잊을 수는 없었다. 뒤에도 처음에도 없는 단 한번의 괴이한 인연. 봉평에 다니기 시작한 젊은 시절의 일이었으나 그것을 생각할 적만은 그도 산 보람을 느꼈다.
'달밤이었으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는 없어.'
허 생원은 오늘 밤도 또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것이다. 조 선달은 친구가 된 이래 귀에 못이 백이도록 들어 왔다. 그렇다고 실증을 낼 수도 없었으나 허 생원은 시침을 떼고 되풀이할 대로는 되풀이하고야 말았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조 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즈러는졌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모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모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 선 허 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 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물래방앗간의 성씨처녀
■ 내래이션 : 재능시낭송협회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줏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모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팔자에 있었나 부지.'
아무렴 하고 응답하면서 말머리를 아끼는 듯이 한참이나 담배를 빨 뿐이었다.
구수한 자줏빛 연기가 밤기운 속에 흘러서는 녹았다.
'날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달리 기다리는 놈팽이가 있는 것두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단 말야. 짐작은 대고 있었으나 성서방네는 한창 어려워서 들고날판인 때였지. 한집안 일이니 딸에겐들 걱정이 없을 리 있겠나. 좋은 데만 있으면 시집도 보내련만 시집은 죽어도 싫다지...... 그러나 처녀란 울 때같이 정을 끄는 때가 있을까. 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으나 걱정 있을 때는 누그러지기도 쉬운 듯해서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제천인지로 줄행랑을 놓은 건 그 다음날이였나?'
'다음 장도막에는 벌써 온 집안이 사라진 뒤였네. 장판은 소문에 발끈 뒤집혀 고작해야 술집에 팔려가기가 상수라고 처녀의 뒷공론이 자자들 하단 말이야. 제천 장판을 몇 번이나 뒤졌겠나. 하나 처녀의 꼴은 꿩 궈 먹은 자리야. 첫날 밤이 마지막 밤이었지. 그때부터 봉평이 마음에 든 것이 반평생을 두고 다니게 되었네. 평생인들 잊을 수 있겠나.'
'수 좋았지. 그렇게 신통한 일이란 쉽지 않어. 항용 못난것 얻어 새끼 낳고 걱정 늘고 생각만 해두 진저리나지...... 그러나 늘그막바지까지 장돌뱅이로 지내기도 힘드는 노릇 아닌가. 난 가을까지만 하구 이 생애와두 하직하려네. 대화쯤에 조그만 전방이나 하나 벌이구 식구들을 부르겠어. 사시장철 뚜벅뚜벅 걷기란 여간이래야지.'
'옛 처녀나 만나면 같이나 살까...... 난 거꾸러질 때까지 이길 걷고 저 달 볼 테야.'
동이의 과거
■ 내래이션 : 재능시낭송협회
산길을 벗어나니 큰길로 틔어졌다. 꽁무니의 동이도 앞으로 나서 나귀들은 가로 늘어섰다.
'총각두 젊겠다 지금이 한창 시절이렸다. 충줏집에서는 그만 실수를 해서 그 꼴이 되었으나 설게 생각 말게.'
'처 천만에요. 되려 부끄러워요. 계집이란 지금 웬 제격인가요. 자나깨나 어머니 생각뿐인데요.'
허 생원의 이야기로 실심해한 끝이라 동이의 어조는 한풀 수그러진 것이었다.
'아비 어미란 말에 가슴 터지는 것도 같았으나 제겐 아버지가 없어요. 피붙이라고는 어머니 하나뿐인걸요.'
'돌아가셨나?'
'당초부터 없어요.'
'그런 법이 세상에.'
생원과 선달이 야단스럽게 껄껄들 웃으니 동이는 정색하고 우길 수밖에는 없었다.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정말예요. 제천 촌에서 달도 차지 않은 아이를 낳고 어머니는 집을 쫓겨났죠. 우스운 이야기나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고, 있는 고장도 모르고 지내 와요.'
고개가 앞으로 놓인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내렸다. 둔덕은 험하고 입을 벌리기도 대견하여 이야기는 한동안 끊겼다. 나귀는 건듯하면 미끄러졌다. 허 생원은 숨이 차 몇번이고 다리를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나이가 알렸다. 동이 같은 젊은 축이 그지 없이 부러웠다. 땀이 등을 한바탕 쪽 씻어 내렸다.
여울목
■ 내래이션 : 재능시낭송협회
고개 너머는 바로 개울이었다. 장마에 흘러 버린 널다리가 아직도 걸리지 않은 채로 있는 까닭에 벗고 건너야 되었다. 고이를 벗어 띠로 등을 얽어매고 반벌거숭이의 우스꽝스런 꼴로 물 속에 뛰어들었다. 금방 땀을 흘린 뒤였으나 밤물은 뼈를 찔렀다.
'그래, 대체 기르긴 누가 기르구.'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의부를 얻어 가서 술장사를 시작했죠. 술이 고주래서 의부라고 전 망나니예요. 철들어서 부터 맞기 시작한 것이 하룬들 편한 날 있었을까. 어머니는 말리다가 채이고 맞고 칼부림을 당하고 하니 집 꼴이 무어겠소. 열여덟 살 때 집을 뛰어나와서부터 이 짓이죠.'
'총각 낫세론 섬이 무던하다고 생각했더니 듣고 보니 딱한 신세로군.'
물은 깊어 허리까지 채였다. 속 물살도 어지간히 센데다가 발에 채이는 돌멩이도 미끄러워 금시에 훌칠 듯하였다. 나귀와 조 선달은 재빨리 거의 건넜으나 동이는 허 생원을 붙드느라고 두 사람은 훨씬 떨어졌다.
'모친의 친정은 원래부터 제천이었던가?'
'웬걸요, 시원스리 말은 안 해주나 봉평이라는 것만은 들었죠.'
'봉평? 그래 그 아비 성은 무었이구?'
'알 수 있나요. 도무지 듣지를 못했으니까.'
'그 그렇겠지.'
하고 중얼거리며 흐려지는 눈을 까물까물하다가 허 생원은 경망하게도 발을 빗딛었다. 앞으로 고꾸라지기가 바쁘게 몸째 풍덩 빠져 버렸다. 허비적거릴수록 몸을 걷잡을 수 없어 동이가 소리를 치며 가까이 왔을 때에는 벌써 퍽으나 흘렀었다. 옷째 쫄짝 젖으니 물에 젖은 개보다도 참혹한 꼴이었다. 동이는 물 속에서 어른을 해깝게 업을 수 있었다. 젖었다고는 하야도 여윈 몸이라 장정 등에는 오히려 가벼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안됐네. 내 오늘은 정신이 빠진 모양이야.'
'염려하실 것 없어요.'
'그래 모친은 아비를 찾지는 않는 눈치지?'
'늘 한번 만나고 싶다고는 하는데요?'
'지금 어디 계신가?'
'의부와도 갈라져 제천에 있죠. 가을에는 봉평에 모셔 오려고 생각 중인데요. 이를 물고 벌면 이럭저럭 살아갈 수 있겠죠.
'아무렴 기특한 생각이야. 가을이랫다?'
동이의 탐탁한 등허리가 뼈에 사무쳐 따뜻하다. 물을 다 건넜을 때에는 도리어 서글픈 생각에 좀더 업혔으면도 하였다.
왼손잡이 동이
■ 내래이션 : 재능시낭송협회
'진종일 실수만 하니 웬일이오, 생원.'
조 선달은 바라보며 기어코 웃음이 터졌다.
'나귀야. 나귀 생각하다 실족을 했어. 말 안 했던가. 저꼴에 제법 새끼를 얻었단 말이지. 읍내 강릉집 피마에게 말일세. 귀를 쫑긋 세우고 달랑달랑 뛰는 것이 나귀 새끼같이 귀여운 것이 있을까. 그것 보러 나는 일부러 읍내를 도는 때가 있다네.'
'사람을 물에 빠뜨릴 젠 딴은 대단한 나귀 새끼군.'
허 생원은 젖은 옷을 웬만큼 짜서 입었다. 이가 덜덜 갈리고 가슴이 떨리며 몹시도 추웠으나 마음은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벼웠다.
'주막까지 부지런히들 가세나. 뜰에 불을 피우고 훗훗이 쉬어. 나귀에겐 더운 물을 끓여주고. 내일 대화 장 보고는 제천이다.'
'생원도 제천으로?'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시니같이 눈이 어둡던 허 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 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