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浮石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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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에서 유학을 하던 의상대사는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이 들려오자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 교학을 펴기 위해 귀국하여 부석사를 창건했다.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된 곳이기도 한 부석사는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국보와 보물을 보유하고 있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곳이다.
현재 사찰 내에는 국보 제17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앞 石燈), 국보 제18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국보 제19호 영주 부석사 조사당(榮州 浮石寺 祖師堂), 국보 제45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 국보 제46호 부석사조사당벽화(浮石寺祖師堂壁畵), 보물 제249호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榮州 浮石寺 三層石塔), 보물 제255호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榮州 浮石寺 幢竿支柱), 보물 제735호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榮州 浮石寺 高麗木板), 보물 제1562호 영주부석사오불회괘불탱(榮州 浮石寺 五佛會 掛佛幀), 보물 제1636호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榮州 浮石寺 石造釋迦如來坐像), 경북유형문화재 제127호 부석사원융국사비(浮石寺圓融國師碑)가 남아있다.
부석사 가는 길
은행나무가 울창한 가지를 서로 맞잡고 내어준 길은 눈앞에서 시원하게 뻗어나가며 걸음을 재촉한다. 오르막길이 아무리 힘에 부쳐도 머리 위에서 한들거리는 잎새들의 움직임을 느끼며 걸어 오르다 보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부석사무량수전앞석등(浮石寺無量壽殿앞石燈)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자리한 석등으로 국보 제17호이다.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부른다.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는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無(무)’자가 새겨 있다. 이는‘삶의 고난과 걱정, 근심을 모두 비우고 편안한 마음으로 보내드리자’는 뜻을 안고 있다.
부석사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로 국보 제18호이며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지어졌으나 공민왕 7년에 불타 버리고 고려 우왕 2년과 광해군, 1916년에 각각 보수공사를 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최고의 건축미학을 자랑하는 무량수전은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묵묵히 품고, 아름다운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浮石寺 塑造如來坐像)
부석사 무량수전의 주존으로 봉안된 높이 2.78m의 고려시대 소조불상으로, 무석사 무량수전에 모셔져 있으며 1962년 국보 제45호로 지정되었다.
불상은 우견편단의 대의에 촉지인을 하고 결가부좌로 앉아있다. 나발의 머리에 크고 둥근 상투모양의 머리묶음이 올려 졌고 얼굴은 살이 오른 풍만한 인상으로 이목구비의 표현이 뚜렷하다. 목은 긴 편이고 삼도가 일정한 간격을 보인다.
신체 표현도 넓은 하체로 인해 당당하고 어깨도 건장하고 넓다. 대의에는 간격이 좁은 평행의습선을 일률적으로 새기고 있다. 불상의 뒤로 독립된 목조광배가 놓여있다.
신광과 두광을 2조선의 원으로 각각 구분하고 화염문을 돌려 주형거신광을 이룬다. 문양은 화염문과 당초문이 넓고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두광에는 3구, 신광은 4구의 화불을 부착시켰던 흔적이 남아 있다.
불단은 동향으로 설치되었고 안으로 폭 237cm, 측면이 200cm, 높이 105cm의 토석을 혼용한 수미단의 원형이 남아 있다. 주변에는 신라시대의 녹유전이 있으나 후설된 목조불단으로 인해 가려져있다.
1916년 무량수전의 해체수리 시에 발견된 묵서명에는 공민왕 7년(1358) 적병에 의한 화재로 불상의 두부가 분리되어 우왕 2년(1376) 원응국사(기록에는 원륭이라 하나 잘못이다.)가 개금개조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무량수전불상개금문에서는 조선 경종 3년(1723) 통정 정상주를 비롯한 74명의 정성으로불상을 개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우견편단의 평행의습선이나 촉지인을 한 자세 등에서 통일신라 8세기 이후의 양식을 보이기도 하나 작고 두툼해진 입술표현이나 근엄해진 표정, 굳은 인체표현이나 딱딱해진 옷 주름 등에서는 시기적인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고려시대 불상으로는 정교하고 소조상으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어서 매우 귀중한 작품이다.
부석사 조사당( 浮石寺 祖師堂)
부석사 조사당은 무량수전 뒷산에 있는 건물로 이 절을 지은 의상조사의 진영을 안치하고 있다. 1962년 국보 제19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신종 4년(1201)에 단청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이 확실하다.
그 후 고려 공민왕 때의 병화로 소실된 것을 우왕 3년(1377)에 원응국사가 재건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조선 성종 21년(1572)에 경연한 기록이 있어 이 건물의 변천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건물은 낮은 장대석 기단위에 있는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창호는 전면 중앙에 출입문이 있고 그 좌우에 광창이 있다.
건물 내부의 입구 좌우에 보살상, 사천왕상 등 고려 말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는데 1918년에 벽을 떼어서 보장각내 유리장에 보존하고 있다.
부석사조사당벽화
제석천과 범천, 사천왕 등의 호법신장들을 모두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으로, 부석사조사당 안쪽 벽면에 그려져 있다.
1962년 국보 제46호로 지정되었다.
조사당 벽화는 원래 조사당의 입구 좌우벽에 그려져 있던 것을 1918년 떼어내어 유리 상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지금은 경내 보장각에 전시, 보관하고 있다.
크기는 가로 75cm, 세로 205cm이며, 원래의 그림순은 보살상, 다문천왕상, 광목천왕상, 증장천왕상, 지국천왕상, 보살상이다.
제석과 범천은 풍만하고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이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보는 건장한 무장상인데, 이들의 위풍당당한 위세, 우아한 형태, 능숙한 필치 등에서 고려불화 가운데에서도 독특한 품격을 볼 수 있다.
본래의 채색에 몇 번에 걸쳐 새로 덧칠한 것이 많아 원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고려불화풍이 꽤 간직되어 있는 편이다.
양식적으로는 12세기 내지 13세기의 불화양식과 근사하며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벽화로서는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서 고려시대 회화 중 가장 중요한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부석사 삼층석탑(浮石寺 三層石塔)
무량수전의 동편 약간 높은 지대에 있다. 2중 기단에 3층의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1963년 보물 제249호로 지정되었다.
지대석과 하층기단의 하대를 한데 붙여 8석으로 짜고 중대석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있어 3구로 구분하였으며 갑석은 6매석이다.
상층기단은 4매석으로 갑석을 짜고 각 면에 우주 1주를 모각하였다.
탑신과 옥개는 각층마다 1석으로 구성되었는데 옥신 표면에는 우주가 있을 뿐 아무 장식도 없다.
받침은 각층 모두 5단씩으로 되어 있고, 처마 아래는 직선이나 전각에 반전이 있으며 그 좌우에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옥개석 위로는 괴임을 두어 옥신석을 받쳤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만이 남아 있다. 노반은 1단의 갑석이 있고 복발은 사방에 꽃모양이 양각되었다.
1960년대 해체수리 시 3층 탑신 중앙에 얕은 사리공이 확인되었으나 사리장치는 없었고, 기단부에서 철제탑, 불상조각,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부석사 당간지주(浮石寺 幢竿支柱)
부석사 경내로 올라가는 최하층의 좌측 노변에 위치해 있으며, 1963년 보물 제255호로 지정되었다.
양 지주가 1m 간격으로 동서로 상대해 있고, 전면에는 별다른 조식이 없고 다만 양쪽 모서리로 모를 약간 죽였다. 전후 양 측면으로는 20cm폭으로 두 줄의 음각선대를 테두리에서 5.4cm 간격을 두고 넣었다.
지주 정상부의 바깥쪽 모서리는 호선을 2단으로 깎아내었고 안쪽에는 간구를 내었는데 장방형이다.
양 지주 사이에는 간주를 받는 대석이 남아있는데 사각형의 하대 위에 원형으로 테를 만들고 안으로 지름 30cm의 원공을 두어 당간이 끼워지도록 하였다. 원형의 테 밖으로는 몰딩과 연꽃무늬를 새겼다.
간결, 단아해 보이게 비교적 가늘고 긴 편이면서도 아래와 위의 두께에 다소 차이가 있어 안정감을 지녔다. 조성연대는 부석사가 창건된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부석사 고려목판(浮石寺 高麗木板)
부석사에 전해 내려오는 『대방광불화엄경』의 판본이다. 1982년 보물 제735호로 지정되었다.
전본 육십화엄경 241장, 주본 팔십화엄경 275장, 정원본 사십화엄경 123장, 그 외 법화경 수륙잡문(잔판) 15장으로 모두 634장의 판본이 보장각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이 화엄경의 저본은 거란본으로 보이므로 12세기경 이후, 고려시대에 개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방책판식으로 좁은 판심에 어미와 흑구가 없어 권자형식에서 방책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특징을 보인다. 고려 화엄경이 14자, 혹은 17자본임에 비해 부석사 각판은 34자본이라는 것도 한 특징이다.
원본판과 함께 선조 1년(1568)에 만들어진 보판도 포함되어 있다. 미타경을 조성한 것이 고려 고종 37년(1250)으로 당시 주지 충명국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화엄종의 종찰로 자리한 부석사에서 미타경에 비해 화엄경은 이보다 앞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1200년경, 1250년 사이에 조판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부석사에서 내려다본 풍경
무량수전을 등지고 사찰을 떠나려하면 부석사의 마지막 아름다움이 발길을 잡는다. 겹겹이 이어진 기와들의 행렬이 어딘가로 날아오를 듯 저마다 날개를 펴고, 그 너머로 보이는 부드러운 능선은 뽀얗게 일어나는 운무 사이에 마치 꿈처럼 아련하다.